채근현이라는 이름의 정체

 

 

향후 해피 밸리 전사 연구를 위해서 자세히 밝혀두고 갈 필요가 있어서 잠깐 옆 걸음질을 한다앞으로, 특히 아일랜드나 영국에서 해피 밸리 전사를 연구할 때 중요한 참고가 되게 하기 위해서 이다진실을 알아내기에 무척 긴 시간이 걸렸다여기서 중요 지명을 살펴보고 지나가자. 

 

앞서 말한 쟁고개는 '작은 고개'라는 뜻이다반면 얼스터 대대가 철수할때 사용하려고 예정했었던 메네미 고개는 '큰 고개'라는 다른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현재의 주민들은 모두 쟁고개라는 이름만 알고 있다하지만 영국군의 모든 전사는 이 고개를 '채근현'으로 기록하고 있었다.

 

나는 이 해피 밸리 전투의 조사를 하면서 열 번 이상 이 지역을 방문했었고 많은 주민들을 만났다현지 주민들을 만날 때마다 채근현에 대한 명칭을 물었으나 아는 분은 한 분도 없었다해피 밸리의 전사를 제대로 기록하려면 적어도 이 명칭에 대한 조사가 정확히 선행되어야 하기에 무척 고민을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얼스터 대대 본부가 사용하던 쟁고개 입구 기차 터널을 방문했다가 그 터널 입구에 제궁현[濟宮峴] 터널이라는 명칭이 써 있던 것을 발견하였다여기서 제궁현이 비슷한 발음의 채근현으로 잘못 오역된 것을 추측할 수가 있었다.



제궁현 터널 - 남서쪽에서 본 입구


 

나중에 마을 어른으로 부터 북쪽에서 쟁고개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양주시 장흥면 삼상리 마을의 옛 이름이 제궁동[濟宮洞, Jegung village]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마을은 얼스터 대대의 B 중대가 투입되었던 195 고지의 능선에서 100미터 떨어진 산아래에 있었다[현지 주민들은 195고지를 달님봉이라는 상당히 낭만적인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제궁현[濟宮峴Jegung pass]은 제궁동[濟宮洞]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었고 채근현은 제궁현이 변질, 오기(誤記) 된 것이었다[]은 마을을 뜻하며 현[]은 고개를 뜻한다. 제궁동이란 궁궐을 모시는 동네라는 뜻이다. 나는 이 작은 시골 마을에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주민이 이 일대가 유명한 일영의 내시촌에서 멀지 않은 곳이고 부근에도 궁궐에서 은퇴한 내시들과 여자 상궁들이 살았었다고 말해주었다삼상리 즉 제궁동은 이곳은 내시들 거주 지역에서 제일 남쪽이고 궁궐에 가장 가까운 곳이다마을 주변을 걸어 다니며 조사해보니 달님봉[195고지] 아래 계곡 속에 아름드리 나무가 자라고 있고 축대도 잘 만들어진 터가 있었다.

 

지금은 아무 건물이 없고 터만 있지만 과거 작은 절이 있었지 않나했는데 한 촌로는 이곳에 6.25 무렵까지 무당이 살았다고 한다그렇다면 이 곳은 절은 아닌듯하고 퇴역 내시들이 궁궐의 여러 제사를 지낸 제각(祭閣)이 있어서 제궁동이라는 명칭의 제공처가 되었지 않나한다충성스런 내시들이 다 세상을 떠나고 이씨 왕조도 망하자 제사도 흐지부지 되다가 무당이 세들어와 살다가 제각이 없어졌으리라.

 

 

두 고개 - 윗쪽에 쟁고개[채근현]와 아래쪽의 메네미 고개. 두 고개의 직선 거리는 약 3km 정도 된다. 지금은 두 고개를 잇는 직선 도로가 뚫렸다.


 


해피 밸리에 전개한 얼스터 대대

 

 

브로디 준장이 지휘하는 29영연방 여단의 세개 대대 즉, 얼스터 대대가 좌측에 전개했고 그 우측즉 동쪽 송추에는 퓨질리에 대대가 전개했다그리고 두 개 대대 남쪽에는 그로스터 연대가 예비대로서 배치되었다쟁고개에 배치된 얼스터 대대의 오른 쪽에는 퓨질리에 대대가 있었고 서쪽에는 하와이에서 온 미군 25사단 35연대 2대대 E중대가 있었다.

 

그 전방 임진강 이남에는 한국군 1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한국에 파견된 얼스터 대대의 대대장은 행크 칼슨 중령이었다해피 배리 전투에서 부대를 지휘하게 될 비운의 토니 브레이크 소령이 부대대장이었다보병 대대에 도날드 에슬리 쿠퍼 대위가 지휘하는 크롬웰 탱크 14대가 배속되었다


영국군은 더 대형인 84mm [20파운드]로 장비된 센추리언 전차도 있었으나 해피 밸리의 도로 상황이 우마차나 다니는 좁은 농로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중전차의 기동에 문제가 있다는 판단이 소형인 크롬웰 전차의 파견으로 결정되었다결과는 그 판단과 전혀 다른 반대 방향으로 움직여서 파견 전차대 전멸이라는 비극을 가져왔다더 크고 튼튼한 센추리언의 궤도라면 중공군의 수류탄 공격에 그토록 쉽게 파괴되지 않았었을지도 모른다.

 

 

크롬웰 전차 - 무게 28톤, 75mm 포, 2정의 기관총을 장비했고 시속 40마일이라는 쾌속을 자랑했지만 장갑이 약한 단점이 있었다. 주조 기술이 아닌 리베트 결합의 구식 기술로 만들어졌다.

 

 

쿠퍼 대위는 영여단의 후사르 [경기병]대대소속으로 이 지원 전차 부대를 로얄 아티렐리 부대에서 크롬웰 전차 8정찰 중대에서 크롬웰 전차 6대를 배속 받아 총 14대의 전차로 편성했다해피 밸리에서 전개한 전차가 10량이라는 설도 있지만 14대가 맞는 것으로 보인다전차외에 지원나온 부대로서 170 중박격포 대대의 4.2인치 박격포 중대도 있었다.

 

만약에 이상적인 상황에서 중공군과 일대일로 대결한다면 능히 중공군의 1개 사단과도 전투를 해볼만한 전투력을 가진 부대가 해피 밸리의 얼스터 대대라고 하겠다영연방군은 서울 교외 북쪽 외곽에 배치된 마지막 부대였다서울 시내에 들어와 북쪽에 태국 부대가 있었기는 했지만 예비대 성격의 부대였었다

 

얼스터 대대의 전선여기가 뚫리면 서울은 더 이상 지켜 줄 부대가 없었다서울은 빠르게 비워지고 있었다피난을 갈 곳이 있는 시민들부터 서울을 떠나고 있었다점차 갈 곳이 없는 서울 시민들도 무턱대고 서울을 떠났고 서울은 점점 유령도시화 되어갔다.

 

 

 

해피 밸리[Happy Valley]라는 이름의 유래

 

 

서울 북방에 배치 된 얼스터 대대는 혹독한 추위 속에서 그런대로 2 주간을 전투 없이 보냈다얼스터 대대원들은 지난 11월 부산에 도착한 이후 계속 이동을 계속하였지만 해피 밸리[행복한 골짜기]라는 명칭의 이름이 붙은 이 곳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가 있었다.

 

 

앞에 보이는 산이 노고산이다.

 

 

앞에 보이는 산이 노고산이다. 동쪽을 보고 찍은 사진인데 제법 계곡의 분위기가 나타난다.


 

 

 

이 사진은 반대로 노고산을 등지고 서쪽을 보고 찍은 사진이다강이 매우 좁아졌다.앞에 보이는 곡릉 철교에서 첫 기습이 있었다.

 

이 해피 밸리라는 지명이 이 곳에 붙게 된 것의 연유에 대해서 B중대장이었던 로빈 찰리 대령은 이렇게 설명했다주변에 많은 건물들이 들어 선 지금 보면 그런 골짜기의 느낌이 별로 나지 않지만 그때는 지금보다 넓은 곡릉천에서 우람해 보이는 노고산쪽을 보면 완연한 골짜기의 분위기가 느껴졌었다.

 

배치된 뒤에 장병들이 이곳에 붙인 별명은 처음에는 Comp valley 였었다‘Comp의 계곡이라는 뜻이다Comp는 당시 영국군에게 지급되던 비상 식량으로서 미군의 C레이션과 비슷했었다그런데 Comp valley가 어느 틈에 해피 밸리로 명칭이 바뀌었다.

 

로빈 찰리 대령은 해피 밸리의 명명자가 주임 상사[color sergeant]가 틀림없다고 말했다항상 명랑했었던 주임 상사는 유머 감각이 있었다그는 살을 에는 추위에도 대대 취사반이 설치된 터널 밖으로 나와 "아이스크림 먹을 사람!" 하고 익살을 부렸었다.

 

그는 덜덜 떨면서 불평을 하는 장병들을 그 곳 지명을 해피 밸리로 부르는 위트로서 달랬을 수도 있다경계 활동을 하며 휴식과 훈련을 하던 대대는 중공군이 임진강을 건너 고랑포 지역으로 침투한 19501231일부터 전투태세로 돌입하여야 했다그러나 며칠 전부터 심하게 앓고 있던 대대장 행크 칼슨 중령은 상태가 더 나빠져서 다음 날인 11일 대대의 지휘를 부대대장 토니 브레이크 소령에게 맡기고 일본으로 후송을 떠나야 했다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좋지 않은 징조를 느낄 수 있는 지휘관의 교체였다.


 

쟁고개 정상에서 남쪽을 보고 찍은 사진 - 오른쪽으로 B중대가 올라간 195 고지와 통한다. 남하하는 중공군의 시각으로 촬영한 것이다.


 

 


한국인 가정의 채근현 전투 전야

 

 

195111일 늦은 오후 쟁고개 바로 입구 제궁동에 살던 18세의 소녀. 이정옥은 단단히 무장을 한 영국군들이 바로 집뒤의 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아버지는 근심스런 표정이 되었다.

 

"저 젊은 놈들이 밤에 내려와서 너에게 행패를 부릴까 두렵구나."

 

그러나 딸 걱정만 하던 아버지는 한 걸음 나아가 상황이 점점 안 좋게 돌아간다는 것을 직감하기 시작했다정면에서 빨갱이 부대가 몰려오고 있다는 사실은 중공군에게 밀려 삼삼오오 후퇴해오는 국군 1사단의 병사들을 보고 알 수가 있었다아버지는 반공 단체인 대한 청년단 부단장이었다만약에 공산군이 이곳 마을을 점령하면 자신과 가족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북한군이 남한을 점령하고 있던 19506월부터 9월까지 석 달 간 바로 얼스터 대대가 전개한 삼상리와 삼하리 두 곳에서 무려 16명이나 되는 우익 인사들이 공산당에게 학살당했고 수복 후 피해 가족들은 가해자들이나 그 가족들에게 보복의 죽음을 내렸다죽고 죽이는 학살극은 한국전 초반 전국을 휩쓸었캄보디아에서 발생했었던 킬링 필드의 비극은 그 20여년 전에 이미 한반도에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50년대 가난한 후진국이었던 한국이 유별나게 세계 최고의 맹렬한 반공국가였던 것을 이런 배경이 있었다.

 




그는 죽음이 집안에 어른거리는 것을 직감했던듯했다그는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우리 집안 전체가 몰살당해서는 안 될 것이 아니오?! 일부라도 살아납시다나는 우선 큰 아들과 저 딸을 데리고 남쪽으로 피신할테니 당신은 여기서 두 아들을 데리고 일단 버티다가 상황이 안 좋으면 피난을 가시오." 


라고 말했다.

 

195111일 그날 밤은 무섭게 추웠다산에 올라간 영국군들은 밤새 내려오지 않고 산에서 지냈다아버지가 염려하던 것 달리 마을로 들어온 병사는 없었다바로 이 마을의 뒤에 있는 산에 전개한 부대는 얼스터 대대의 로빈 찰리[Robin Charley]대위가 지휘하는 B 중대[B com]였다.


 

195 고지 부근에 파져 있는 다섯개의 참호중 한 개

 

 

조금 아래에도 참호 세 개가 더 파져 있다지금은 나무가 우거져 아래를 내려다 볼 수가 없으나 적의 예상 접근 방향인 북쪽 방면의 시계가 아주 양호한 곳이다주민들은 이것이 얼스터 대대원들이 판 참호가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해피 밸리 전투장에서 참호를 파는 얼스터 대대원


이렇게 깊이 팠으니 참호가 지금도 남아 있었을 것이다직사각형의 참호는 세월이 지나면서 긴변이 더 무너지고 작은 변은 덜 무너져 둥그런 형태가 되고 바닥은 얕아진다. 그 참호의 상태를 보면 참호의 나이를 알수가 있다춘천 옥산표 164고지에 19505월에 춘천 군민들이 판 수백개의 참호가 남아있는데 이 참호의 둥글고 바닥이 얕아진 정도가 195고지의 참호와 거의 꼭 같다.



 

아침이 되자마자 아버지는 남자 옷으로 변장한 딸 정옥과 큰 아들 덕기를 데리고 남쪽으로 향했다이들은 일주일간 갖은 고생을 다해 여행하여 서울에서 150킬로 떨어진 청주 친구 집에서 지내다가 중공군이 모두 물러간 3월에야 돌아왔다

 

아버지가 떠난 집에 아들 둘과 어머니만 남았다12, 이 날은 비교적 조용히 지냈다. 둘째 아들 이석기는 지게로 박격포탄 2발씩 든 탄약 박스를 대대본부 터널 앞에서 부터 195 고지 능선 얼스터 대대원들에게 두번 운반해주고 초코렛 바 하나씩을 얻어먹었다.

 

마침 내린 눈으로 천지는 하얗게 변해있었다그러나 다음날 13일 아침부터 공기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그러나 이날 새벽부터 전투는 개시되기 시작했었다야간 정찰을 나간 B중대 소속 Bruford-Davis 중위의 수색대는 새벽 무렵에 전방에 전개한 북한군과 교전을 벌이고 압도적인 적의 병력에 더 대항하지 못하고 포로가 되었다


조금후 날이 밝으면서 북 오른쪽 고지들의 B중대와 왼쪽 고지의 A중대는 북쪽에 나타난 적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사격을 가했다사격을 받은 적들은 곧 물러갔다이런 적의 고의적인 노출은 중공군이 부대 주력을 서쪽으로 투입하기 전에 얼스터 대대의 주의를 북쪽으로 끌기위한 양동작전으로 보인다.



 본 글은 "국방부 N.A.R.A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