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성(靑星) 포병의 신화[1]
 
 
하숙집 주인 반동이 되다
 
1950년 6월 28일 춘천이 북한의 수중에 떨어지자 한 무리의 북한군들이 시내의 어느 허름한 하숙집에 들이닥쳤다. 그리고 하숙집 주인을 "국군 포병대대장을 하숙시켰다"는 허무맹랑한 죄목을 붙여 반동으로 몰아 체포하였는데(후에 다행히도 탈출하였다) 이때 북한군들이 이구동성으로 "그 놈(포병대대장) 때문에 1개 연대가 전멸 당하였다"고 하면서 치를 떨었다.

 

개전 초기 북한군의 모습
 
굳이 비유를 하자면 신호를 위반해서 경찰에 단속된 운전자가 애꿎은 자동차를 두들겨 패는 꼴이라 할 정도의 소심한 복수극이었다. 얼마나 북한군의 피해가 컸으면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죄목을 뒤집어 씌워 하숙집 주인을 체포 하였을까? 하여튼 두고두고 북한군을 분노하게 만든 그 놈은 바로 국군 6사단 16포병대대장이었던 김성(金聖, 1923~1993)소령이었다.

 

김성 16포병대대장
 

김성 소령은 지금과는 물론이거니와 당시 북한군 포병과 비교하였을 때도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 빈약한 장비로 무장한 포병대대를 지휘하였지만, 결코 이를 탓하지 않고 철저한 사전 훈련을 통하여 전사에 길이 전해지는 위대한 승리의 선봉장이 되었다. 바로 6.25전쟁 초기의 성패를 가름한 유명한 춘천-홍천전투(1950년 6월 25일~6월 29일)의 축약된 모습이기도 하다.

 

춘천전투 전적비
 

1950년 6월 29일, 청성부대는 그 동안 철벽같이 방어하여 오던 춘천과 홍천지역을 포기하고 충주를 향하여 전략적 후퇴를 단행하였다. 이로써 국군이 일방적으로 패퇴하던 6.25전쟁 초기의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대첩이라 불리는 군계일학 같은 전과를 기록한 춘천-홍천전투가 막을 내렸다. 춘천-홍천전투는 지형을 적절히 이용하고 철저한 사전 훈련으로 군기를 강화한 국군 6사단이 중과부적인 상태에서 이룬 대승으로 그 찬란함이 더하다.

 

춘천-홍천전투의 주역 청성부대
 

하지만 춘천-홍천 전투의 의의가 큰 이유는 글의 앞에 쓴 것처럼 단지 북한군 1개 연대를 괴멸시킨 전술적인 승리 때문만은 아니다. 분노한 김일성이 이 전투에서 망신을 당 한 북한군 2군단장을 비롯한 예하 부대장을 즉각 교체하거나 문책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청성부대의 승리는 북한의 개전 초기 전략을 완전히 틀어버린 엄청난 전과로 전체 전선에 걸쳐서 매우 막대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춘천 시가지
 

전쟁 직전 약 98,000명이었던 국군이 7월 초 한강 남단에 방어선을 구축하였을 당시, 중장비 대부분은 북한군이 점령한 한강 이북에 남겨 놓은 상태였고 남은 병력도 불과 3만 명 선에 불과하였던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만일 이때 북한군 2군단이 국군 6사단을 격파하고 예정대로 홍천을 거쳐 수원까지 진격하여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였으면 국군 잔여병력은 일거에 소멸되어 버리고 전쟁은 거기에서 끝날 수도 있었던 순간이었다.

 

북한군의 예정 진격로
 

6월 28일,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한강을 도하하여 진격을 계속하기 전까지 3일간 서울에서 지체하였던 미스터리 같은 이유 중 하나가 동부전선에서 청성부대에 대패한 북한군 2군단의 작전차질이었다. 북한군 주력이 서울을 공략하는 동안 조공을 춘천-홍천-수원으로 우회 남진시켜 국군의 퇴로를 차단한 후 포위 섬멸하려 하였던 그들의 기도가 춘천-홍천전투로 산산조각 났던 것이다.

 

춘천-홍천전투를 이끈 김종오 6사단장
 

이런 청성부대의 승인으로는 앞에 설명한 것처럼 북한강, 소양강, 말고개 등 방어에 유리한 지형지물을 적절히 이용한 것 외에도 사단장 김종오 대령을 비롯한 예하 사병들의 철저한 준비태세 때문이었다. 그중 청성부대 예하 16포병대대의 활약은 춘천-홍천전투 승리의 밑거름이 되었다. 북한군이 하숙집 주인을 반동으로 몰아 체포하도록 만들었을 만큼 그 누구보다도 위대하였던 이들의 활약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