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스터 장병들의 장렬한 최후

 

 

내가 해피 밸리 전투장을 여러 번 방문 조사하면서 들었던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다얼스터 장병들의 최후 모습이다모두 엎드려 쏴 자세로 사격을 하다가 전사했으며 전사체 주변에 빈 탄피가 수북했다는 것이었다적어도 3명 이상의 목격자들이 이를 공통되게 증언했다이들은 전투 직후 동네 어른들이 얼스터 대대원들이 대단히 용감하게 싸웠지만 운이 없어서 형편없는 되놈들에게 당했다고 자주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이었다.

 

 

    

중공군이 찍은 사진

 

메네미 고개로 올라가는 논길에서 당한 사진인데 얼스터 대대원이 서쪽을 보고 엎드려 전사했다자켓은 이미 강탈당한 뒤의 사진이다현지 목격자들이 증언한대로 중공군이 서쪽에서 공격해왔고 얼스터 대대원들이 엎드려 쏴자세로 끝까지 응전했음을 보여준다. 




  

한국에서는 이미 참전 영국군의 성전이 된 그로스터 연대의 임진강 전투는 잘 알려져 있지만 이들의 전사자가 67명에 지나지 않았다. 포로는 700여명이 넘었다. 그러나 얼스터 대대는 157명이나 전사하고 포로는 20명에 지나지 않았다물론 두 전투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겠지만 그래도 해피 밸리의 전사자가 거의 세 배가 되었고 전투가 네 시간이나 끌었다는 것은 이들 각각의 병사들이 최후까지 군인답게 저항했었다는 것을 말한다고 하겠다.

 

 

크롬웰 전차

 

 

작전에 투입 된 크롬웰 전차 14대 중 한 량도 귀환하지 못했다해피 밸리에서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하지 못하고 비운의 운명을 맞은 쿠퍼 부대의 크롬웰 전차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하다주민들 말에 의하면 해피 밸리 전투장에 유기된 전차 중 절반은 곡릉천 북쪽에절반은 그 남쪽 메네미로 가는 길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했던 것은 이 전차들의 포탑이 전부 서쪽을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전차대를 공격했던 중공군이 항상 하는대로 침투 우회한후 삼하리 서쪽 방향에서 전차대들에게 공격을 해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메네미 고개가 막히거나 선두 전차가 농수로에 떨어져 기동로가 막혀 버리자 전차들이 차체를 돌려 서쪽 구파발 방향으로 탈출을 시도했을 가능성도 제시하기도 한다.

 

(이 길은 미군들이 철수한 길로서 해피 밸리의 영국군 철수 길보다 훨씬 넓은 대로다.)  실제로 이쪽으로 탈출을 시도했었던 크롬웰 전차가 있었다바로 뒤에서 설명한다앞서 증언을 소개한 이태호씨는 영국군 전차 2대가 도로를 벗어나 자기 집 논에 들어와서 유기되었다는 말을 들려주었다.


 

 

해피 밸리 전투장에 유기된 크롬웰 전차1.

 

 

   

해피 밸리 전투장에 유기된 크롬웰 전차 2.

 

 

두 량의 전차는 논바닥에 엔진 오일을 쏟아 놓아서 그 논의 농사가 삼년 동안이나 잘 되지를 않았다이 전차들은 곡릉천을 건너 메네미로 가던 전차였는데 논으로 들어간 것은 막힌 농로를 우회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다른 두 크롬웰 탱크가 이 해피 밸리 전투장을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치다가 그 마지막 순간에 파괴된 것은 아주 애석한 일이었다. 

 

소개한대로 한 량은 남쪽 메네미 고개 정상 밑에서 파괴되었고 다른 한 량은 서쪽 전투장을 한참 벗어난 서쪽 용본 터널 

(현지인들은 굴칸이라고 부른다) 속에서 파괴되었다 

 

 

 

 

우측의 푸른 원안이 최초로 공격을 받은 곡릉철교좌측의 붉은 원내에 있는 것이 용본 터널

 

 

 


서쪽으로 탈출을 시도했었던 크롬웰 탱크기 들어갔던 용본 터널의 입구 안에서 크롬웰이 들어온 입구 쪽을 보고 촬영 사진이다. 터널은 센추리언 전차도 통과 할 만큼 넓고 높다.


 



전차가 들어간 터널 입구에서 멀리 보이는 노고산은 이 크롬웰 전차가 해피 밸리 전투장을  거의 탈출했음을 보여준다.

 

 



 

이 사실은 양주군 장흥면 해피 밸리 주민들은 잘 모르고 옆 고양시에 거주하는 이강만 어르신의 친구들이 증언해주었다터널 속에서 발견된 크롬웰 전차는 곡릉천에서부터 철로를 따라 그냥 달려온 듯한데 중공군이 따라와서 하필 터널 속에서 파괴한 것은 다른 전차들이 할 수도 있는 더 이상의 탈출을 봉쇄하기 위함으로 판단된다.

  

이곳은 해피 밸리 전투장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으로서 굴만 통과하면 서울과 개성을 연결하는 큰 국도가 바로 앞인데 안타까웠다100여 미터만 더 갔으면 넓은 국도를 타고 전속력으로 서울로 탈출할 수가 있었는데 말이다.

 

 

    

위의 크롬웰 탱크 승무원들은 견장이 있는 북한 군복을 입은 것으로 보아 북한군들임이 틀림없다.

 




 

전투장에 유기된 크롬웰 중에 몇 대는 후에 중공군과 북한군에게 사용되었다윗 사진을 보면 북한군 복장의 전차병들이 보인다중공군의 복장에는 어깨에 붙이는 견장이 없다당시 한국에 들어온 중공군들은 전차가 없었고 전차병이나 정비병도 없어서 소련제 T-34 운영에 경험을 축적한 북한군에게 운영을 맡겼는지 모른다크롬웰 한 대는 인천에 전개한 북한군에게 제공되었다가 재차 상륙한 한국군 해병대에게 빼앗겼다.

 

 

 

인천의 바닷가에서 발견 된 크롬웰 전차. 한국군 해병대가 노획했다인천은 북한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다른 한 대의 운명은 극적이다이 손이 바뀐 크롬웰 전차는 중공군의 한강 방어를 위해 한강에 끌려가 철교 밑에 숨어 있다가 19512월 위력 수색차 한강에 출동한 미군 수색대를 엄호하던 영국군 센추리언 탱크에게 발견되어 파괴되었다.

 

 

 

  노량진 둑길에서 포격을 하고 있는 센추리언

 

 

 

 공산군 크롬웰 전차가 숨어있었던 한강 철도 교각밑 현재는 복선으로 증설 되었고 그 위를 한국 TGV[ KTX] 가 다닌다.


 





이곳에 가보면 사거리가 3,000야드 정도 되는 원거리 사격전이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나머지들은 그냥 해피 밸리 전장에 유기되었다가 돌아온 영국군에게 모두 회수되었다. 

 


 

하나의 가정

 


얼스터 대대가 해피 밸리에서 당한 불운은 여러 나쁜 상황들이 빚어낸 것이지만 또 만약에 이렇게 했더라면 그런 비극을 피할 수있지 않았었나 하는 생각을 아니 할 수가 없다나는 그런 가정중에 하나로 들 수 있는 짧은 기록을 얼스터 대대 전사에서 발견하였다. 

 

얼스터 대대 전방에서 방어하다가 후퇴하던 한국군 1개 대대가 3일 오후 얼스터 대대의 남쪽에 배치되었는데 블레이크 대대장 대리가 철수에 방해가 된다고 이들을 조기 철수시켰다는 것이다해피 밸리 전투의 결과로 봤을 때 유감을 안 느낄 수가 없다얼스터 대대 전사 논조는 자기들 앞에서 중공군에게 패해서 후퇴하는 한국군 1사단의 전투력을 별다르게 크게 평가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메네미 고개에 배치한 한국군도 오합지졸의 패잔병이라는 식으로 표현했다하지만 1사단은 한국군 최정예 사단으로서 낙동강 전선에서 다부동 전투에서 미군과의 협동 작전으로 대구를 방어해냈으며 북한 수도 평양을 점령했었던 사단이었다북진했을 때도 평북 운산에서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무사히 탈출해 나온 사단이었다또 나중에 서울을 재탈환 할 때도 앞장을 섰었던 부대였다한국군 사단 중에서 미군으로 최고의 평가를 받았던 사단이었고

 

또 외국군과 협동 작전에 가장 많은 경험을 쌓은 부대였었다백선엽 사단장은 임진강 방어전선에서 1사단이 무너지고 후퇴한 것은 중과부적으로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고 말하고 있다하여튼 1사단은 그렇게 경멸할 수 있는 전투력의 소유 부대가 아니었다일개 대대면 당시 얼스터 대대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큰 지원군 부대다이들이 배치되었다는 남쪽을 보면 얼스터 대대원이 피해를 입은 메네미 고개 밖에 없었다.

   

전투 당일과 다음날 메네미 고개를 통과했었던 이 씨 형제 동생 준기 씨는 이 메네미 고개 여기저기에 모닥불의 흔적을 보고 영국군이 이곳에도 배치되었나 보다 했다는데 이것은 한국군 1사단 대대 병력이 주둔했었던 흔적이었다이들의 존재가 영국군 철수에 무슨 장애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이들의 배치를 몇 시간만 더 유지했더라면 메네미 고개에서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 아닌가하는 가정을 해본다.

  

 


2차 채근현[제궁현] 전투

 

 

밤하늘을 울리던 총성과 피리소리가 끝나고 전몰한 얼스터 대대원들이 땅속에서 원혼을 달래고 있던 2개월 뒤에 채근현에서 또 전투가 있었다얼스터 대대 본부가 쓰던 채근현 터널[제궁현 터널]이 중심이 된다중공군을 서울에서 철퇴시키고 유엔군과 한국군이 북진하자 중공군들은 쟁고개를 통하여 북으로 후퇴를 하였다.

  

미군 전차 부대가 이들을 추격해왔다한 무리의 중공군들, 적어도 1개 중대의 이상의 중공군이 쟁고개를 넘어 300미터 쯤 갔을 때 하늘에서 미군 전폭기가 나타나 중공군 행렬의 선두에 기총소사를 가했다미군 조종사는 지형을 잘 아는 사람 같았다선두에 기관총탄이 쏟아지자 놀란 중공군들은 모두 뒤로 돌아 채근현 터널로 뛰어 들었다채근현[제궁현] 터널은 길이 63미터로 아주 짧다깊이 들어가서 몸을 피할 수가 있는 터널은 아니다

 


 


얼스터 대대본부가 사용하던 제궁현 터널 - 3 개월 후에 네이팜탄 투하로 중공군의 화장터가 되었다.

 




 

중공군들이 터널로 다 들어간 것을 확인한 조종사는 정확히 입구를 조준한 네이팜탄을 투하했다불꽃과 비명이 같이 터져 나오는듯하다가 터널 양쪽으로 계속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후에 굴속을 들여다 본 주민들은 그 끔찍한 모습에 고개를 돌렸다그 곳은 완전 화장장 아궁이가 되어 있었다.

 

굴속으로 대피했었던 병력의 거의가 다 타죽었다마치 장작을 쌓은 것처럼 시체들이 겹겹히 쌓이고 겹쳐있었다이석기씨는 이 안에서 죽은 중공군들이 최소 백명은 넘을 것이라고 했다폭격이 있고 조금 뒤에 이석기씨 댁에 도저히 사람의 몰골로 볼 수없는 중공군 댓 명이 찾아왔다. 채근현[제궁현] 터널 폭격의 유일한 생존자들이었다.

 

그들은 굴 속에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굴옆에 있다가 '유탄'을 맞은 것인데 걸음도 제대로 못 걸어 전우에게 겨우 매달려 끌려오듯하는 부상병도 있었다얼굴과 손에 검은 화상을 입고 옷들도 여기저기 타있었다살갗이 타고 들어난 붉은 속살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 중화상자도 있었다.

 

그들은 중화상을 입었지만 약이 없어서 그러니 간장을 조금만 달라고 했다간장이 화상 치료에 좋다는 민간 요법을 들은 것 같았다어렵게 살던 난리 중이라서 이석기 집안에 한국인 가정의 상비 식품인 간장도 없어서 이들을 그대로 돌려보냈다이석기 씨는 이들 중 절반은 가다가 죽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이들의 상처가 깊어보였다영국군 얼스터 대대 전사자들을 묻어주었던 주민들은 터널속의 중공군의 시체들은 너무 끔찍해서 모른체 했었다그러고 몇 주가 지나자 미군 영현대에서 장비를 가져와 중공군 사체들을 모두 수거해갔다2차 채근현[제궁현] 전투는 며칠간 계속되었다미군의 탱크들이 주간에 나타나 위력 수색을 하고 195 고지에서 중공군이 공격하는 전투의 양상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전투에서 이준기 소년은 중공군이 쏜 총에 맞아 다리 관통상을 입었고 그의 외할아버지는 미군이 195 고지에 잘못 투하한 네이팜이 집에 떨어져 사망했다.

 

중공군이 더 멀리 후퇴하고 나서 이 집안의 전투는 끝이 났고 멀리 남쪽으로 피신 갔었던 아버지와 가족들도 돌아왔다그리고 봄이 오고 이 집안의 전투는 비로서 끝이 났다


 

 본 글은 "국방부 N.A.R.A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