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가 확실해 보였지만 전쟁이 아직 종결되지 않았던 19456, 미 육군 항공대는 차세대 폭격기의 개발에 착수하였다. 전쟁 전부터 폭격기에 대한 애착이 워낙 강하였던 미 육군이 이번 전쟁에서 그들의 믿음처럼 B-17B-29가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었기에 가능한 시도였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이처럼 B-52는 군부가 가장 유복하였던 시기에 탄생한 걸작이었다.

 

 

유럽 하늘을 휘 젖고 다닌 B-17

 

 

 

지난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은 B-29가 일본 본토까지 날아가 폭격을 가할 수 있는 비행장을 확보하는데 매진하였었다. 따라서 순수하게 군사적으로 중요한 섬들만 골라서 점령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는데 이오지마나 오키나와 전투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의 극렬한 저항에 부딪혀 엄청난 피를 대가로 받쳐야 했다. 이런 혹독한 경험은 새로운 폭격기 개발에 있어서 중요한 고려 사항이었다.

 

 

 

티니안 섬에 전개한 B-29

 

 

 

차세대 폭격기는 미 본토나 해외의 안정된 거점에서 출격하여 원거리에 위치한 목표 지역을 충분히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된다고 판단하였다. 그때 제시 된 ROC4,500kg의 폭탄을 탑재하고 10,000m 상공에서 시속 300km이상 속도로 최대 8,000km 비행이 가능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거의 완성 단계에 있던 B-36이 이런 조건을 달성하였는데도 복에 겨웠던 미군은 다른 것을 또 요구한 상황이었다.

 

 

미 군부는 B-36 등장하기도 전에 그보다 더 강력한 폭격기를 원하였다

 

 

 

이런 군부의 동향을 파악하고 즉시 시안을 제시하였던 항공사가 B-17, B-29를 만든 폭격기의 명가 보잉(Boeing)이었다. 19467월 제시된 모델 462로 명명된 이 기종은 모두 6개의 프로펠러 엔진을 장착하는 것으로 계획되었는데, 전반적으로 B-29를 삼면으로 확장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정작 이 프로젝트에 XB-52 제식번호를 부여한 군 당국은 대단히 실망하였다.

 

 

보잉사가 최초 제안한 모델 462

 

 

조만간 본격적으로 배치가 될 것으로 예정 된 B-36과 비교하여도 객관적인 성능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격은 훨씬 비싸다는 점도 한 몫 했다. 미군은 내심 제트추진과 같은 최신기술을 접목하여 B-36을 훨씬 능가하는 차세대 폭격기를 원하였지만 정작 보잉사는 단지 경쟁기종을 제시하였을 뿐이었다. 군의 요구를 재차 확인한 보잉은 설계를 변경하기 시작하였다.

 

 

 

B-52의 설계 변경 내용

 

 

 

핵심은 최초의 제트추진 폭격기였던 B-47 스트라토제트(Stratojet) ()폭격기처럼 주익을 후퇴익으로 변경시키고 여기에 8기의 제트 엔진을 탑재하여 운항 능력을 높이는 것이었다. 최초 제시한 모델 462와 비교한다면 유사한 부분을 찾기 어려울 만큼 완전히 다른 새로운 개념의 폭격기였다. 오늘날까지 날아다니는 B-52는 이처럼 1940년대 말의 기술로 설계가 완료되었던 것이다.

 

 

1955년 실전 배치 된 B-52A

 

 

 

당시 B-52의 등장은 오늘날로 치면 B-2와 맞먹는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길이 48m, 너비 56.4m, 무게 221, 최대항속거리 2km, 실용 상승한도 18000m여서 이론상으로는 미국 본토에서 전 세계 주요 거점을 직접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였고 거기에 더불어 당대 최고의 F-86 전투기 속도와 맞먹는 최대 마하 0.95의 스피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초기형인 B-52B

 

 

 

B-526.25전쟁이 한참이던 1952년에 첫 비행에 성공하였고 그 능력에 만족한 미군은 양산에 착수하여 1955년부터 실전배치하기 시작하였는데 1년도 안된 1956년 비키니 섬에 수소폭탄을 투하 실험을 성공시키면서 차세대 전략폭격기의 등장을 만방에 고하였다. 반면 미 전략공군의 핵심 주먹으로 잠시 군림했던 B-36은 순식간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하면서 조기 퇴역에 이르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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