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관련 기사나 다큐멘터리 혹은 영화를 보면 발발 후부터 서울 피탈까지의 긴박한 순간을 묘사할 때 북한군 전차가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런데 두꺼운 전사책의 구석구석을 살펴보지 않으면 그 다음에 전차가 등장한 내용을 찾아보기는 막상 힘들다. 이것은 개전 초기에 전차가 맹활약한 것은 맞지만 얼마 못가 주역의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이야기다.

 

 

 

전차는 개전 초를 제외하고 큰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2차 대전 내내 유럽 전선에서 전차가 지상전의 왕자였던데 비한다면 6.25전쟁에서 전차는 그렇게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전차의 절대 수량이 급속히 소모되었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북한은 낙동강 공방전 당시 보유했던 전차가 모두 소진되자 19508월초 소련으로부터 대량의 T-34를 긴급 원조 받아 제16, 17땅크여단을 편성하여 전선에 투입하였다.

 

 

낙동강 전선에서 격파 당한 북한군의 T-34

 

 

유엔군도 상당량의 전차를 운용하였으며 중공군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처럼 개전 초와 달리 이후 전차가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는 점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미소 군고문단의 의견처럼 한반도 지형이 전차가 활약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환경이라는 뜻이다. 한반도가 종심이 짧지만 험준한 산악이 많고 도로가 거의 없어 전차가 기동하기에 극히 불리한 환경이라는 최초의 분석이 옳다는 의미다.

 

 

이런 모습이 흔한 한반도에서 전차는 운용하기 어려운 무기임에 틀림없다.

 

 

전쟁을 통틀어 최대의 전차전으로 기록 된 195010월의 정주 전투만 보더라도 동시에 포신을 섞은 전차가 아군 10, 북한군 7대였을 뿐이었다. 결국 우리나라의 지형은 설령 많은 전차가 투입되었더라도 일거에 작전을 펼치기에는 애초부터 불가능하였다. 특히 도로망, 농경지 정리 및 도심 확장이 이루어진 최근보다 당시의 상황은 더욱 열악하였다.

 

 

이 정도가 가장 큰 도로였을 만큼 한반도는 전차기동에 극히 불리하였다

 

 

그렇다면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애초부터 '한반도에서 집중화된 전차부대의 운영이 힘들다면 전차 부대를 보병 지원용으로 사용한 북한의 전술이 타당한 것은 아닌가?'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전쟁에서 속도전과 기동전은 기습의 효과가 극대화되는 전쟁초기에나 발휘 할 수 있는 전술인데 북한은 이러한 기회를 놓쳤다. 전선이 고착화 된 이후에는 아무리 집중화 된 기갑부대라도 전선을 돌파하는데 애를 먹을 수밖에 없다.

 

 

당시 전차의 주 용도가 돌파 수단이 아닌 보병지원용임을 알 수 있다

 

 

"적은 별로 큰 지장 없이 부산까지 진격을 할 수 있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한강 도하 후 수원까지 10일간의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였고, 우방군은 이 기간 중 미 24사단을 증원할 수 있었다. 북한군은 초전의 성공을 종심 깊은 돌파로 전과를 확대하지 못하여 결국 전략적 승리로 이끌어 가지 못하였다 "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북한군의 실책을 언급한 맥아더

 

 

 

"북한군이 8월 하순 급히 편성하여 낙동강 전선에 투입하였던 제16, 17땅크여단을 사전에 편성하고, 또한 제2차대전시 독일군처럼 통합 편성하여 경부축선 등 어느 한 방향에 집중하여 종심 깊은 돌파와 전과확대, 신속한 추격을 실시하였더라면, 미군이 한반도에 투입되기 전에 부산까지 점령할 수 있었을 것이다" 리델 하트(Basil Liddell Hart)

 

 

 

부평 인근 경인가도에서 격파당한 북한군의 T-34 잔해

 

 

결국 북한은 실기(失期)를 한 것이다. 한반도가 전차 운용에 극히 불리한 지형이지만 초전에 제한된 축선이라도 이곳에 전차를 집중하여 종심을 타격하는 송곳으로 이용하였다면 전쟁의 양상은 바뀌었을 것이다. 낙동강에서 전선이 고착화된 이후에는 이미 돌파할 수 없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북한의 판단 착오는 대한민국이 살아 날 수 있게 된 결정적 실수가 되었던 것이다. (계속)

 

 

 

 

 본 글은 "국방부 N.A.R.A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