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진 철수

 

 

그러나 영연방군이 선전(善戰)하는 동안 후방 서울의 미 8군은 다음 날 4일을 서울을 완전 철수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고 서울 북방의 전방 부대들에게 그날 중으로 중공군과의 접전을 끊고 철수하도록 명령했다철수 명령은 오후 3시에 얼스터 대대의 왼쪽[서쪽], 25사단 35연대 2대대에게 제일 먼저 하달되었다. 이 대대에 영국군 옆 선유동 계곡 입구 고지에 배치되었던 E중대가 편성되어 있었다.

   

철수 명령을 먼저 받은 미군의 사단은 번개같이 움직여 불과 한 시간 반만인 오후 네 시 반에 철수를 완료하였중공군에게 데인 경험이 많은 미군은 다가올 밤이라는 것이 중공군의 기습에 어떤 역할을 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영국군의 우측 송추쪽 퓨질리에 대대도 얼스터 대대보다 한 시간 먼저 철수 통보를 받고 철수를 완료했다.

   

퓨질리에 대대도 이날 하루 전방에 밀려온 중공군과 격전을 통해 200여명을 사살하는 기염을 토했다이 대대의 철수 특징은 차량을 먼 후방에 대어놓고 도보로 적전 이탈을 했다는 것이다그들이 승차를 완료한 시각은 다음날 새벽 1시였다얼스터 대대에게 철수 명령이 떨어진 것은 인접 퓨질리에 부대가 철수 명령을 받은 시각으로부터 한 시간이나 지난 1830분이었다.

 

[여기에 여러 이설들이 있지만 앤드류 새먼 기자 '마지막 한방' 의 책을 참조한다.]

 

이미 어둠이 해피 밸리 지역을 완전히 덮은 시각이었다이 지역에서는 오후 5시면 해가 지고 6시 반이면 캄캄한 밤이 된다. 얼스터 대대가 철수 명령도 제일 늦게 받은 것에 별다른 설명을 보지를 못했지만 단순 실수로만 보기는 힘들다얼스터 대대는 옆 미 35연대 2대대와도 무선과 유선의 통신망을 배치했었고 또 재빠르게 철수해버린 E중대를 육안으로 볼 수도 있던 위치였다.[D중대의 고지에서도 잘 보인다.]

   

더구나 미군의 트럭이 얼스터 대대 최초 철수 부대를 수송하러 해피 밸리에 오는 업무 협조를 하기도 했었다. 통신이 되었다는 것이다얼스터 대대에 내린 철수 명령이 늦어진 것에 무슨 이유가 있었겠지만 이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없으니 답답할 뿐이다이 결과 얼스터 대대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다량의 군수품을 일일히 차량에 적재하고 그 차량들을 좁은 길로 줄을 지어 무리하게 운행해야 하는 철수를 해야했다얼스터 대대는 중공군의 마수가 언제 뻗힐지도 모르는 걱정 속에서도 철수 준비에 들어갔다.

 

 


 

 

한국전쟁중에 중대장과 대대장을 역임했으며 미 참모대학 졸업자인 이대용 장군께 대대병력이 철수하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지 물어보았다. 한국전 최다 전투 경험자인 이장군은 바로 대답을 한다. "두 시간 내외야! 중대는 3-40분이고" 이 말은 철수 명령을 받고 불과 한 시간 반 만에 완료한 미 35연대 2대대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나 얼스터 대대는 철수 준비가 거의 자정까지 걸렸는데 그것은 수송할 군수 물자들이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 된다어느 기록에 의한 것이기보다 현지인들이 증언하는대로 해피 밸리 전투 후에 전장에 유기된 수많은 군수품 트럭들의 숫자가 이를 말해 준다고 하겠다인원 수송에 미군의 트럭 지원을 받은 사실도 이를 뒷받침해준다.

 


 

 

사단이나 군단의 군수체계를 가진 미군에 비해서 여단 규모의 영국군은 자신들이 필요한 군수품을 후방의 병참부대에서 전담하지 못하고 전방까지 직접 수송하고 보관하여야 하는 힘든 병참체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철수 명령을 늦게 받은 얼스터 대대는 유기 장비들이 없도록 모든 짐을 다 트럭에 적재하느라 시간을 잡아먹었다미군들이 급한 상황 철수시 버릴 장비들도 영국군은 모두 챙기는 알뜰한 관습도 이들에게 지연된 철수를하게 하였다.

   

보병들은 고지 언덕에서 내려와 이동하기 시작했다철수 행군 순서는 최전방에 배치되었던 B중대가 앞장서고 그 뒤를 대대 본부가 뒤따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그리고 전투 식량과 탄약을 가득 실은 차량들이 다음, 그리고 C,D A,중대가 뒤를 따랐다마지막을 크롬웰 전차의 쿠퍼 부대와 지원 중대의 파견대와 위장 부대가 후위를 맡았다.

   

마지막 기만과 정찰을 위해서 박격포로 무장한 소대 병력과 장갑차 부대가 쟁고개에 잔류하여 불규칙한 교란 사격으로 적을 견제하도록 하였다

 

 

우마차나 통과가 가능한 철수로 

 

 

철수로는 철로를 따라 난 소로(小路)였다. 나중에 비극의 현장이 된 이 소로는 100미터도 안 되는 언덕들을 옆에 끼고 몇 백 미터 서쪽으로 가다가 곡릉천을 만나면 왼쪽, 즉 하류 쪽으로 휘어져 하천을 따라 갔다.

 

곡릉천을 만나서부터는 산에서 멀어진다길은 무척 좁았다우마차나 겨우 다니는 소로였고 지역 물류나 교통은 이 지역을 지나는 열차가 담당했다이 비극의 길을 가보면 그 후에 자동차 통행을 위해 많이 넓혔다고 하나 지금도 자동차의 속도를 낼 수가 없다. 2013년 해피 밸리 추모식이 처음 열린 후 버스를 탄 방문자들이 이 길을 따라 가보고 싶어 했으나 운전수가 불가능하다고 해서 포기했다.

   

그러니 길의 크기를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그래서 얼스터 대대도 어둠을 이용해서 이 소로를 타고 빨리 전선을 벗어나기로 했다

 

 

쟁고개 길에서 우측으로 직각으로 꺾어진 소로길로 들어서는 곳. 지금은 큰 길이 뻗어 있지만 이곳은 얼스터 대대 본부가 있었다.

 

 

 

을 활용하는 중공군의 후방 침투 전술

 

중공군의 전투 자산은 이고 주특기 전술은 이 자산을 이용해 후방으로 침투, 적을 기습하는 것이었다.  이미 한 달 전 평북 운산에서 미 1기병사단의 한 대대가 이같은 산간 침투와 도로 차단 전술에 의해서 궤멸 되어 버렸다. 그리고 압록강까지 진격했었던 한국군 6사7연대가 중공군의 후방 차단과 야간 기습으로 70%가 소멸되는 큰 피해를 입은 바 있었다.

   

이날 195113일 밤, 중공군의 이 전술이 기능을 발휘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 마련되어 있었다얼스터 대대의 철수로 첫 4분의 1은 바로 적의 접근이 가능한 산을 따라 가는 것이었고 철수로 마지막 부분 4분의 1도 적의 매복이 가능한 산길이었다앞에서 말했듯이 첫부분 철수로 우측은 낮은 산[언덕]이 동행하듯 도로를 따라 형성되어 있다.

   

이는 영국군의 철수 중 중공군이 얼마든지 도로 차단과 측면 공격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이 중공군 전술이 이날 밤 바로 이 순간에 꿈틀대고 있었다블레이크 소령은 중공군으로부터 철수를 숨기기 위한 여러 조치들을 취했었다그것보다는 기본적으로 얼스터 대대에게는 이 우회 침투 가능성이 높은 도로 옆 언덕[]에서 일 분이라도 빨리 떨어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겠다'기도 비닉'보다도 '신속 이탈'의 전술적 명제가 더 급한 상황이었다.

 

 

최초 기습이 가해진 곡릉 철교. 쟁고개에서 남으로 내려가는 철수로와 나란히 뻗은 언덕형 산맥 - 철수시 이 언덕의 위험을 인지하고 빨리 이탈해야 했었는데 유감스럽다.

 

얼스터 대대가 철수중 공격당한 곡릉철교

 

 

 

 

전차부대 지휘관 쿠퍼 대위가 철수의 선두에 서겠다고 자원했지만 전차의 요란한 엔진 소리가 적에게 부대 철수를 알린다고 믿어서 이 요청은 거절당했다모든 트럭과 보병이 떠난 후 전차 부대는 뒤에서 천천히 후위를 맡아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철수는 계획대로 되어 가는 듯했다.

 

최전방 195고지에 배치되었던 로빈 찰리 대위의 B중대가 내려와 대대본부 블레이크 소령에게 철수 완료를 보고한 시각이 22:00이었다그는 중대원을 인솔하고 미군이 제공한 트럭에 승차해 해피 밸리를 벗어나고 있던 중, 갑자기 상공에서 엔진 소리가 나며 조명탄이 떨어졌다미 공군의 C-47이 투하한 조명탄이었다.

 


 

[한 얼스터 대대의 기록은 여기에서 로빈 찰리 대령의 증언과 차이가 많이 난다책은 그가 보고를 21:00에 했다는 것인데 나는 여기서 찰리 대령의 증언쪽을 채택한다. 그는 나에게 그 증언을 직접했었다로빈 찰리 대령은 트럭에 승차한 지점과 트럭의 운전병이 흑인 병사였음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을만큼 기억력이 좋았다.

 


 

 

영국의 얼스터 전사는 이 조명탄이 수없이 떨어져서 영국군의 전면 철수가 중공군에게 발각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로빈 찰리 대위는 조명탄이 여러 발이 아니라 한 두 발 투하된 것을 기억하고 있다로빈 찰리 대령의 중대는 무사히 메네미 고개를 넘고 서울 시내를 관통하여 한강을 넘어 수원의 서울 농대 캠퍼스로 철수했다.

 

장거리 철수로 그가 수원 캠퍼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새벽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하지만 얼스터 대대의 철수가 조명탄 투하에 의해 중공군에게 발각되었다는 것은 조금 과장이 심한 듯하다영국군이나 미군이 제대로 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다면 언덕에 가리워져 중공군은 조명탄이 아무리 투하되어도 해피 밸리를 관측할 수가 없다.

   

나는 얼스터 대대의 움직임을 중공군이 알 수가 있었던 것은 시계 가능한 주간에 철수해버린 35연대 2대대의 탓이 제일 크다고 본다이 사실을 앞에서 침투조의 출현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말했다늦은 오후지만 이들의 철수했던 시각에는 시계가 좋았었다미군 대대 병사들이 능선의 참호에서 빠져나와 철수하는 것을 전방에 배치된 중공군 초병들이 놓치지 않을리가 없다. 

 

그리고 어두워지자 이 비워놓은 얼스터 대대의 서쪽 측면, 선유동 계곡 입구를 중공군들이 마음대로 드나들며 살피다가 영국군의 철수 징조가 보이자 이 빈 곳으로 대병력을 투입해 얼스터 대대를 공격했던 것이다또 얼스터 대대의 철수가 중공군에게 샅샅이 알려졌다는 가능성으로 앞에서 해피 밸리에 북한군 첩자가 투입된 징조가 있다는 사실을 소개했었다 

 

결국 이날밤 얼스터 대대를 덮친 여러 불운 중의 하나지만 중공군은 얼스터 연대의 움직임을 손금 보듯 들여다 보고 작전을 진행할 수가 있게 만들었던 불운도 있었다. 철수 날짜가 다음 날 주간으로 연기되었거나, 하루 일찍만 있었어도 하다못해 미군의 철수만 댓시간 늦었더라도 해피 밸리의 비극을 없었으리라 옆의 미군이 제대로 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더라면 중공군은 관측 가능 고지로의 접근이 불가능해서 조명탄이 아무리 투하되어도 해피 밸리에서 철수하는 영국군을 관측할 수가 없을 것이다.

 

 

 본 글은 "국방부 N.A.R.A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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