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동란 국군이 패배한 유명한 전투가 몇 개 있다. 초전 동두천 전투, 초산 전투, 덕천 전투, 횡성 전투, 현리 전투 등이 그것인데 패배한 전투에 느끼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가장 컸던 전투는 (나의 개인 의견이지만) 1950628일 새벽에 서울이 어이없게도 북한 전차 단 두 대와 승차 보병 1개 소대에게 붕괴되어 버린것이다.

 

 

한국 전쟁중의 김포기지

 


서울 시내에 적전차 출현소식에 모두가 대피하기에 바빴고 한강교는 다리 위에 수천명의 시민들과 차량들이 건너고 있는 중에 폭파되어 버렸다. 수도가 무너진 이유는 의정부 쪽에서 퇴계원 쪽으로 우회한 기습부대가 광릉수목원을 가르고 서울 동쪽으로 저항없이 침투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전선이 무너졌다해도 일국의 수도가 이처럼 소부대에게 붕괴당한 사례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전술적으로 말하면 우회에 의한 기습에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1970년대까지 광릉수목원에 전차가 밀집한 나무를 밀어버리고 지나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서울의 동북부의 빈틈을 뚫고 서울로 침투한 보전 협동부대의 성공에는 지역 좌익분자의 안내가 있었다. 전차에 탄 부역자(附逆者)가 길을 안내했다는 이야기다아무리 정밀한 지도나 나침반을 가지고 있어도 현지민에 의한 안내나 정보 제공없이 적지에 진공한다는 어렵다는 사실은 6.25 동란사가 아주 정확히 가르쳐 주고 있다서울이 전쟁 불과 삼일만에 부역자가 출현하여 대수도를 적 중에 선물하게 했다는 사실을 한국 동란사를 읽자마자 나타나서 적지 않게 불쾌하게 했다

 


한국 전쟁중에 현재 서소문로가 시작되는 삼거리에서 미 해병 M-26 탱크와 포로들

 

 

그런데 이런 부역자의 출현에 응답이라도 하듯  침공된 서울을 수복 작전할 때도 해병 보전조 부대를 안내하는 반공투사(?)가 나타났다. 한국통신이라는 책에 프랑스 AFP 기자 프랑스인 앙리 드 튀렌 기자가 쓴 기사 부분이다.


 

김포비행장에 남겨진 미군기 잔해

 


그는 해병 1사단 배속 해병 전차 대대 활동을 보도했다1950915일 인천 상륙에 성공한 미 해병 1사단은 다음 점령 목표를 김포 비행장으로 설정했다. 1950918일 김포 비행장 공격은 전차가 선도했다선두에 선 전차는 부천에서 김포비행장으로 오는 복잡한 길에서 그만 방향을 잃어 버렸다김포비행장으로 가고 있는 선두 부대의 선두에 섰던 탱크 소대는 어둠속에 길을 잃고 엔진 소음에 묻힌 채 서로 욕설을 퍼부어댔다.

 


한국 전쟁중의 M-26 전차

 


길을 제대로 가지 못한 선두 전차에 욕이 터져 나온 것을 보면 길을 잃고 상당히 오랫동안 골탕을 먹은듯하다. 이때 다홍 치마의 한복 차림 젊은 한국 여자가 도랑에서 튀어 나와 해병들에게 크게 웃기 시작했다.


 

김포기지를 점령한 미 해병 1사단 5연대


 

무장한 전차병들에게 적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미소를 크게 지었고 무표정한 한국인의 얼굴만 보아온 해병들이 야밤에 갑자기 길을 막고 서서 웃어대는 이 여성의 미소가 생소하게 느껴져서 표현을 과하게 한듯하다. 중사는 중대장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이 여자가 길을 알고 있답니다. 남자 친구가 미군이었는데 중사였대요. 그래서 김포기지 클럽으로 자주 춤추러 갔었답니다."

 

미군의 중사(SFC- Sergeant First Class)계급을 정확히 말하는 것을 보면 이 여자는 미군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다. 그 이유만으로도 공산치하에서 죽을 고생을 했을 것이다단지 국군 장교와 사귀었다는 이유만으로 학살당한 젊은 여성이 있었던 흉폭한 공포의 시기였으니까 말이다. 그녀는 진격해오는 전차 부대가 구세주와 같았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나왔던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군"

 

소대장인 중위는 이렇게 말하고서 잠시 망설이다가 외쳤다.

 

"그녀를 따르라!"

 

한밤중에 여섯 대의 전차는 이렇게 한국 처녀의 다홍치마를 따라 길을 제대로 잡고 서서히 김포비행장으로 접근했다. 전차 6대는 미군 전차 소대 편제인 5대에 포병 FO나 공군 FAC포함된 것이다.

 

바른 방향으로 들어선 전차부대는 비행장을 방어하는 북한군이 해대는 사격을 무시하고 그대로 돌진했다비행장에 도착하자마나 북한군이 여기저기에 쌓아놓은 비행기 엄폐용 모래 주머니 뒤에 도착해서 본대의 도착을 기다렸다이렇게 해서 김포비행장은 917일과 18일 사이 야간에 점령되었다. 야간에 북한군은 김포비행장을 탈환하기 위해서 공격해왔다가 100여명의 전사자 시신을 남기고 격퇴되었다.

  

다음 날 오전 비행장 주변이 확실하게 확보되자 오후 245분 첫 번째 C-54 수송기가 도착하기 시작해서 비행장 경비요원들과 지상요원들을 내려놓는 것을 시작으로 그 날, 18일 오후에만 35대의 수송기가 도착해서 비행장을 전투 상태로 가동 준비를 시작했다.


 

북한 공군이 김포비행장 격납고에 유기한 소련제 공격기 IL-10



인천에 상륙한 해병들의 한국 전투사를 보면 낙동강 전투에서 서울 공격 그리고 장진호 탈출 전투 때 한국 사람이 중간 중간에 큰 도움을 준 사실이 소개된다. 그러나 미군 전사는 한국인의 협조를 너무 단순하게 언급한 것이 유감이다그러나 그때 공산당의 학정에 무자비하게 당한 한국인들은 미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하고 협조했던 사실이 추정된다서울 수복의 짧은 전사지만 가슴으로 이 전사를 읽어보면 서울이 무너질 때의 울화통 터지는 일화와 함께 항상 대조되어 떠오르는 전사이기에 수록해보았다.

 

 

 본 글은 "국방부 N.A.R.A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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