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81119일 노량해전, 이순신 제독은 임진란의 마지막 해전이며, 자신의 마지막 해전에서 전투 중에 적탄을 맞고 세상을 떠난다.

 

 

충무공 이순신 - NAVER 이미지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세상을 뜨면서 남긴 마지막 비장한 유언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는 후세인들에게 잘 알려진충혼의 명구이다. 노량해전은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명령했던 조선침략 왜군 총 퇴각의 마지막 단계에서 발생한 전투다.

 

 

 

충무공이 전사한 관음포 앞 바다

 

 

충무공 이순신 제독에게 봉쇄된 그를 구해 내고자 조선 파병 왜군의 모든 수군이 몰려왔다. 명 수군 진린이(고니시에게 뇌물을 받았었다.) 반대하는 이 전투를 충무공은 과감하게 주도해서 다수의 적선을 격파하는 최후의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전투의 후반기에 그는 적선에서 날아온 화승총 연환(鉛丸)을 가슴에 맞고 최후를 맞이 했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어느 적선에서 저격한 것인지 아무런 기록이 없지만 일본 측에는 간단한 기록이 있다. 조선 출병 사쓰마 군 총대장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 1535-1619)가 지휘하는 군선에서 발사한 조총에 충무공이 전사했다는 기록이다.

 

 

 

 

시마즈 요시히로의 젊은 시절 초상화

   

 

 

노량해전은 장시간 계속된 격전이었다. 충무공뿐만 아니라 명 수군의 부장 등자룡(鄧子龍)전사했다. 충무공을 저격한 사쓰마 군선은 패퇴하는 군선들의 최후미에 있었다. 충무공의 기함인 판옥선은 이 최후미의 사쓰마 군선을 추격했다. 조선 수군의 판옥선이 추격하자 왜장은 수 명의 조총수를 선미(船尾)에 배치했다.

 

판옥선이 계속 사격을 하며 간격을 불과 수 십 미터로 좁혀 오자 이들 조총수들이 일제히 조총 사격을 했고 충무공이 이 총격에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한 이설에 의하면 충무공의 충직한 부관이었던 희립(宋 希立)이 이 저격수들의 연환이 머리를 스친 충격으로 기절하자 놀란 충무공이 다가가다가 당했다는말도 있다 - 송희립은 나중에 전라 좌수사가 된다.나의 개인적 의견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명항해사 어영담과 같이 한국 해군 잠수함명으로 기리졌어야 했을 임진왜란의 장수다.-

 

그 당시의 원형 납 탄환은 강선이 없는 총신에서 발사되었기 때문에 명중률이 형편없었지만 100미터 내외의 사거리에서 사람 정도 크기의 목표물은 별 어려움 없이 명중시킬 수가 있었다.

 

 

 

규슈 남단에 있는 다네가시마에 전래된 조총

 

 

적 사격의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했으면서도 불과 수 십 미터의 근거리로 접근했던 충무공의 의도는 그날 갑옷이 아닌 전복만 입고 출격했던 사실과 같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이순신 자살론한 근거가 된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규슈 섬의 남단에 위치한 사쓰마 번의 번주였다. 사쓰마 번의 군대는 일본 전국 시대 알아주던 정예군이었고, 이 시마즈라는 인간도 난세가 만들어낸 효웅(梟雄)이었다. 시마즈는 조선 침공의 왜군중에 네 번째로 도해하여 침공 부대에 합류했다.

 

 

 

판옥선

 

 

그는 모우리()군을 이어 강원도 방면으로 북상했다. 왜국 측에서 말하자면 용맹하였고 조선 측으로 말하자면 악독했다. 왜군에도 이 사쓰마 군이 주력군으로 활약했었고 남원성 함락에도 이 시마즈 군이 공격군의 일익을 담당했었다. 조선군들이나 의병들은 전장에서 항상 붉은 두건을 쓰고 지휘한 그를 가리키며 "빨간 두건 쓴 놈이 최고 악질이다."라고 하며 증오했었다.

 

그의 악착스런 전투 솜씨는 잘 알려져서 명의 역사에는 석만자(石蔓子), 조선 역사에는 심안돈(沈安頓)으로 남아있다. -시마즈를 문자로 쓴 것- 그는 임진란 퇴각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동군)대립하던 히데요시 잔존 세력의 이시다 미쓰나리(石田 三成-서군)사이에서 벌어진 세키카하라 전투에서 이시다와의 친분때문에 서군에 가담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서군이 대패하자 그는 66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혈전을 되풀이하며 도쿠가와 최정예 부대-이이, 혼다, 마쓰다이라-의 추격을 따돌리고 살아 남은 불과 수십기만 인솔하고 탈출했다. 그는 오사카를 거쳐 사쓰마 영지로 달아나자 겉으로는 성문을 닫고 강한 저항의 의지를 보이면서 이면으로는 사람을 넣어 이에야쓰에게 애걸복걸하는 이중 전략으로 자신이 은퇴하는 대신 영지를 보존할 수가 있었다. 세키가하라에서 이에야쓰에게 대항했던 비슷한 처지의 모우리 가문이 히로시마의 120만석에서 죠오슈의30만석으로 감봉된 것에 비교가 된다.

 

 

 

 

 

 

 

도쿠가와는 살려준 이 효웅(시마즈)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하지않았다. 살려 둔 것을 내심 후회했었단다. 그는 죽을 때 자신의 머리를 사쓰마로 향하게해서 사후에도 감시를 계속하게 하도록 명했다는 전설이 있다. 도쿠카와의 염려는 먼 뒷날 현실화 되었다. 사쓰마는 이 수모의 원한을 250년간 간직하고 있다가 도쿠가와 막부 말기 역시 같은 반감이 있었던 모우리 가문의 조오슈와 함께 메이지 유신을 일으켜 도쿠가와 막부를 근절하고 근대 일본의 토대를 닦았다.

 

그의 도쿠가와 타도의 군사력에는 조선 남원에서 납치해 간 도공들이 개척한 도자기 촌에서 생산했던 도자기들을 유럽으로 수출해서 벌어들인 재력이 한 몫 했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 가문의 후손은 헤이세이 일왕의 여동생(島津 貴子)과 결혼하여 일본 왕실의 사위가 되었다.

 

 

 

 

 

 본 글은 "국방부 N.A.R.A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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