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명파이터 강삼수 경위의 활동을 소개하였지만 그의 인간적인 측면도 여기에 소개해본다인터넷에 강삼수 경위를 검색해보니 이런 영웅에 관련된 자료가 거의 없다.

 

 

토벌 작전중에 산죽으로 만든 초막에서 쉬고있는 전투 경찰. 텐트 지급이 없던 전투 경찰은 공비들과 꼭같은 방법으로 초막들 만들었다.

 

 

 

단지 강삼수 경위의 조카이며 시인인 강희근씨가 강경위 사후 고생 끝에 작고한 숙모(강경위의 처)의 평토제에 참배하고 그녀가 품고 저 세상에 간 회한을 읊은 시만이 있을 뿐이다강삼수 경위의 전공을 그런대로 자세히 기록한 기록물로서 오래 전에 산청 경찰서에서 펴낸 지리산의 포성이라는 책이 있는데 경찰 기관에서만 배포되어 일반인들은 보기도 힘들고 이 책이 온라인화되기는 힘들 것 같다.

 

그렇기에 나는 후세의 연구를 위해서 앞서 말한대로 그의 전우인 김을로 총장과 인터뷰를 한 내용을 여기에 기록으로 남겨 놓을 필요를 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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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삼수 경위는 경삼남도 산청군 금서면에서 태어났다. 출생한 해는 1925년으로 추정된다. 집안은 중농정도 되는 살림 규모였다. 그는 소학교를 졸업하고 집안 일을 돕다가 일본군에게 징집되어 일본군에서 근무했었다해방이 되어 고향에 왔지만 그는 도시로 진출 못하고 다시 농사꾼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집에는 농사짓는 머슴들도 있어서 그는 시간 여유가 많아 다른 일꺼리을 찾으며 친구들과 자주 어울렸다그는 해방후 산골까지 몰려온 이데올로기의 물결에 휩쓸렸다. 남로당이 거느린 각계각층의 휘하 조직에 민애청(民愛靑)이라는 조직이 있었다.

 

평소 어울리던 동네 청년들이 이 조직에 다수 가담했었고, 친구들로부터 가입하라는 권고를  집요하게 받은 강삼수는 그 조직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친구가 써 온 가입 원서에 도장을 찍어주었다별로 학력이 높지못한 강삼수는 그때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도 모를만큼 순박했었다. 그러나 정부가 좌익 소탕을 본격화하자 그제서야 자기가 속한 조직이 뭐가 잘못된 것이고 반국가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강삼수는 1949년 스스로 산청 경찰서에 출두해 자수하였다. 그는 자신의 죄과는 친구가 내미는 서류에 도장찍은 것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민애청 조직원들과는 친구로서 어울린 것 외에 남로당 활동을 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기가 용서만 받을 수가 있다면 이 조직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정보를 모두 제공하여 수사에 협조할 뜻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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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산청 경찰서 전투 경찰대장은 백남현 경위였다. 그는 일정시에 징집되어 일본 해군 육전대 (해병대)에서 복무했었다. ( 전투 경찰사에 기록 될  유능한 공비  토벌대 지휘관이었으나, 역시 국민과 국가가 기억해주지 못하고 있는 분들중의 한 사람이다.) 당시의 경찰은 남한 전역에 날뛰는 좌익의 준동으로 이를 토벌할 전투 조직 편성에 군사 경험자를 절실하게 필요로 했었다.

 

남북의 대결로 경찰에게 밀려온 군사작전의 중대한 임무는 거의 정규군 수준의 전투력을 요구했었지만 경찰은 이를

감내할 준비도 능력도 없었다한국전 이전부터 경찰은 군사 경험자들이 절실하게 필요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일본군 중국군 만주군등의 복무 경험자들을 스카우트했었다.

 

백남현 경위는 강삼수가 군사 교육을 받은 일본군 징집병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전향하여 대공 투쟁을 같이 하자고 설득했다. 강삼수는 이를 승낙하고 비공식으로 사찰과에 배속되어 좌익 분자 타동에 앞장섰다그러나 당시에 경찰은 정규직 경찰을 뽑지 않아 강삼수는 겉은 산청 경찰서 소속 경찰이었지만 내면으로는 그저 월급도 못받는 비정규직이었다.

 

다음 해인 1950년 북한군의 침공으로 전쟁이 나고 산청 경찰서도 피난을 떠나 고통의 유랑을 하다가 9.28 수복 후 다시 본 자리로 돌아왔다산청 경찰서 관내는 공비들이 창궐했다. 산청 읍내의 본서가 세 번이나 습격을 받았으며 산하 지서나 주둔소가 공비 공격에 당한 것은 부지기수였다.

 

강삼수에게 전투 참여의 기회가 연달아 닥쳤고 그는 전투마다 승리하는 전과를 올려 간부들의 주목을 받았다다음해 19511월에야 경찰관 정기 모집이 있어 강삼수는 간부들의 추천을 받아 경찰 학교에 입교하여 소정의 훈련을 받고 졸업하였다. 비정규직 순경에서 정규직 순경이 된 것이다. 그때부터 앞에서 소개한 그의 대활약은 본격화 되었다.

 

그가 지리산 산청군 일대에서 소탕했었던 전공은 위에서 소개한바대로다. 강삼수 경위는 그 전공으로 단숨에 순경에서 경사를 거쳐 경위로 진급했을뿐더러 화랑, 금성, 은성, 무공훈장들을 받았다.

 

 

 

라이프 지에 소개된 체포 여자 공비들. 사람을 죽인 여공비도 있었다.

 

 

동료 경찰들은 그가 경찰이 아니라 육군의 간부였더라면 더 높은 훈장 즉, 충무나 을지 훈장 같은 것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군이 경찰보다 휠씬 강한 힘을 가지고 있던터라 경찰들의 여러 불만이 있었는데 강상수 경위의 경우도 경찰이 받던 이런 안 보이는 차별의 한 희생물이 아닌가하는 불만을 표출한 것이지만 동료들의 여론은 강삼수 경위의 전공이 수여받은 훈장의 가치에 비해 훨씬 뛰어났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강삼수 경위가 전공을 세우고 훈장을 받으면 덕분에 산청 경찰서장 박우범 경감도 따라서 훈장을 받게 되었다강 경위가 술좌석에서 박우범 서장에게 "서장님이 받으신 훈장은 나 내 덕에 받으신 것입니다." 라고 농담섞인 큰 소리를 치면 박우범 서장은 별다른 소리를 못하고 "그래. 맞아.  다 자네 덕분일세라고 말 대접을 했었다.

 

그만큼 강삼수 경위는 경찰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좁지만 경남 산청군민 사이의 전쟁 영웅으로 큰 인기를 누렸었다. 앞에서 말한대로 그는 산청군민의 전설이 되고 있었다전후 공비들은 급속히 소멸되어갔다. 전투 경찰 뿐만아니라 군 사단 병력이 동원한 대규모 토벌이 몇 번이나 있었는데다가 공비들 지도급 인물인 이현상, 이영회, 방준표, 박영발, 노영호등이 전사를 했으며 공비들 조직에서도 내분이 생겨 결국 급속히 파멸의 길을 갔다.

 

남한 공비들의 씨가 말라가자 명파이터의 입지는 좁아졌다. 더 이상 그를 우대하고 추켜 세우며 토벌 작전에 내보낼 기회도 거의 사라져갔다. 경찰 상부에서 본다면 파이터는 무용지물이 되어간 것이다. 강삼수 경위는 이때부터 총을 든 전투 경찰이 아니라 팬을 든 행정 경찰로서 입지를 다져나가야 했었다.

 

만약 그가 재빨리 변신하여 행정에서도 능력을 발휘했었다면 그는 능히 경감을 거쳐 총경까지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투에는 귀신이었던 강삼수는 행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초등학교 졸업의 낮은 학력도 큰 장벽이 되었지만 그는 행정이니 관리니 문서니 하는 행정업무를 선천적으로 잘 하지도 못했었고 또 좋아 하지도 않았다.

 

이제 토끼 사냥은 끝났고 사냥개는 거추장스러워 잡아먹어 버린다는 토사구팽의 옛 말이 생각나는 환경이 그에게  도래했다. 전쟁이 끝나고 1954년 경찰에서는 대감원의 바람이 불어 무능 경찰들이나 무자격 경찰들을 솎아 냈는데 어떤 연유에서인지 명파이터인 강삼수 경위는 무능 경찰로 낙인찍혀 경찰에서 내쫓길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영웅을 그렇게 대접하면 안 된다는 내외 여론이 일어 강삼수 경위는 서슬 퍼런 감원의 칼날을 비껴 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본서 근무는 못하고 변방 지서만 도는 찬밥 신세로서 전전긍긍, 62년도까지 그럭저럭 버티었다. 그러나 1962년 경찰을 떠나야 했다. 군사정부가 들어선 직후였다. 40세도 안 된 나이에 실업자가 된 것이다그리고 아무런 이재(理財)의 기술이 없던 강삼수 경위는 지리산 전선보다도 더 혹독했던 사회의 삶에서 형편없이 낙오되어 가난이 주는 갖은 고통 속에 휘말려야 했다국가는 그의 전공을 알아주지도 포상을 해주는 일 없이 그저 아무 대책 없었다

 

 

강삼수 경위의 휘하대원으로 싸우다가 전사한 권영도 순경은 사후 2계급 특진을 했고, 화랑무공 훈장을 받았으며 전쟁 기념 사업회에서 지정한 전쟁 영웅이 되었지만 그런 영웅을 알아주는 행운의 한국민 정서는 그에게 닿지 않았다. (산청군에서 만든 빨치산 토벌 전시관에 권영도 순경의 흉상이 있다.-'권영도 순경'의 전공에 대해서도 후에 다루고자 한다.- 주변에서는 권영도 순경이 충분히 추모 될 만큼 용감하고 충성스러웠지만 강삼수 경위의 용맹한 전공은 그보다 한 수위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진주로 이주한 그의 가족은 부인이 차린 동네 구멍가게의 수입으로 그럭저럭 살아갔다.

 

 

 

출동하는 전투 경찰 토벌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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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이지만 언급한다. 강삼수 경위의 부인은 상당한 미인이었는데 주변에서 안스럽게 생각하는 가난의 고통 속에서 두 아들을 키웠다강 경위의 사후 부하 권영도 순경이 국가에 의해서 기려지자 강삼수 경위의 동료들이 강 경위가 무시당하는 처사에 불만을 터뜨렸지만 그녀는 웃으면서 그런 말을 외면했다. 그리고 강삼수 경위의 사후에 그의 추모비를 세우자는 주변의 운동을 단연코 만류했었다.

 

그것은 좌파가 휩슬던 당시 사회 분위기에 남편의 추모비에 무슨 위해가 가해질까 두렵다는 표면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남편의 전공을 국가가 알아주지 않은 것에 대해 심중에 품어오던 내면의 서운함을 표출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시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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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경남 모 지방 신문에 그가 그간 수여받은 훈장들을 엿장수에게 푼돈을 받고 팔아 넘겼다는 기사가 났었다김을로 총장은 왕년의 전쟁 영웅이 곤궁하게 사니까 지방의 사이비 기자들이 그를 악용하는 술책을 부리던데 그의 창피했었던 사정이 그때 그들 기자를 통해서 퍼졌을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강삼수 경위는 삶에 찌들려 살다가 1972년 10월 23일 진주시 대로에서 대형 유조차에 치어 세상을 떠났다치열한 지리산의 여러 전투에서 적에게 한번도 들키지 않고 적의 본거지를 기습하여 치명타를 가격하던 그의 천부적인 전투 감각이 세파에 녹이 슬었던 것일까? 버젓한 백주 대로에서 어린아이도 피할 수있었던 대형 트럭에 그가 죽임을 당했던 것은 한국전 최고 명파이터의 아이러니한  최후가 아닐 수없다.

 

 

 

 본 글은 "국방부 N.A.R.A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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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림앵밝 2013.12.03 21: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한국에서는 나라를 위해 헌신하면 3대가 가난과 고통을 면치 못한다는 말이 100% 사실임을 역사가 입증해 주는군요. 뭐 자식을 낳을 생각조차 없지만, 만일 낳더라도 절대로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지 말라고 가르치겠습니다.

  2. 텍사스코브라 2013.12.20 20: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타까운 이야기군요. 이대우라면 누가 나라를위해 싸우겠습니까;;;
    나같아도 안싸운다 퇘퇘~!!

  3. 잼댕용 2014.02.28 17: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희 아버님도 경찰 출신이셨죠.
    경찰학교를 나오시고 625때 섬진강댐, 지리산, 백운산 등지에서 공비 토벌에 참가하셨구요.
    1962년 군사정권에 의해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공직자에 대한 처벌이 있었지요.
    그 때 경찰에서 떠나 한 많은 인생을 살고 계십니다.
    516이후 그런 일이 없었으면 더불어 저의 인생도 달라졌겠지요.
    지금은 참전용사라고 대우하고 있지만
    그 때 그 일에 대해 크게 불만도 없으시지만
    아들인 저는 기가 막힐 다름입니다.

  4. 의정부순경 2014.05.05 12: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존경스럽습니다. .
    진정한영웅이시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