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전쟁사에는 최초 전사자나 마지막 전사자의 이름이 기록에 남아있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국군의 625 전쟁 최초 전사자는 누구일까? 물론 공식 기록은 없다. 당시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있었는데 이렇게 한가한 기록을 챙길 여유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든다. 그러나 최초 국군 전사자는 전쟁발발 불과 1분만에 전투 위치에서 장렬히 산화한 6사단의 한 보병 중대장이 유력한 후보임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북한이 폭풍이라는 이름으로 남침의 포문을 연 시각이 1950625일 오전 04:00이다 전 전선에 걸쳐 포병의 일제 사격 후 30분 내지 두시간 후 북한군 보병들의 공격이 개시되었다. 남침의 포문이 열린지 단 1분만에 중대 관측소에서 전사한 중대장은 6사단 7연대 3대대 9중대장 이내흥[李來興] 중위다.

 

충북 진천 출신으로 육사 7기 임관 장교다. 국군 공식 전사에서는 전사 당시 그의 계급을 대위로 기록하고 있으나, 확인한 바 전사할 때 계급은 중위였다. 9중대는 지금은 소양호에 수몰된 모진교의 동쪽 9km의 광정면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 중위는 남침 며칠 전부터 북한군의 동향이 아주 수상해지고 있음을 느끼고 경계하고 있었는데 624북한군의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졌었다.

 

이내흥 중위가 전사한 286고지가 보인다. 북한군은 모진교를 건너 푸른 선으로 표시한 북한강을 따라 진격해왔다.

 

7연대는 며칠전 귀순한 북한 전차병(su-76 자주포병)으로 부터 북한이 조만간 전면 남침을 할 것이라고 충격적인 정보를 접해서 일부 전방배치 지휘관들은 긴장하고 있었다. 귀순병의 자백이나 여러가지 좋지 않은 정황을 포착하고 육군본부에 보고했지만 육본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판단을 해 일선 부대 지휘관들은 더욱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중위는 중대 예비인 제2소대를 모진교 동쪽 4km 지점의 286 고지에 배치하고 관측소 내에서 밤을 보내며 상황을 지켜보려고 했던 유비무환의 자세를 보였다. 이 관측소는 지붕이 있던 유개호(有蓋壕)였다. 중대장호만이 유개호였었다. 그러나 2 대대 1중대장이었던 이대용 장군은 그 덮은 지붕이 적의 포탄을 막아내기에는 너무 얇았었다고 회고했다.

 

이대용 장군이 개전초에 투입되었던 중대장 참호는 지금도 남아있다. 중대장 참호는 다른 참호보다도 커서 식별이 쉬웠다. 중간에 등산로가 나있고 소나무가 자라있지만 참호의 네 귀퉁이는 식별이 가능하다.

 

이곳은 시계가 좋아 북한군의 전투 준비 상황이 손금 보듯 훤하게 알 수가 있었다. 이내흥 중위는 걱정속에 북한군의 움직임을 지켜보며 밤을 지새웠던 것으로 생각된다. 과연 다음날 새벽 04:00경 적의 격심한 포격이 개시되었다. 첫 탄이 떨어지자 그는 각 소대의 상황을 확인하고 지시를 내리고자 EE-8 전화기의 수화기를 들었는데 그 순간 북한군이 발사한 122mm 거탄이 관측소에 정통으로 낙하하였다.

 

모진교를 건넜던 북한군 1개 연대는 옥산포 도로에서 1,200미터에 위치한 164고지에서 쏟아져 내려와 돌격한 국군 6사단 7연대 1대대에게 대패하고 패주하였다-사진 중앙이 164고지-

 

유개호는 이런 거탄에 견딜 수 있을 만큼 견고하지는 못했었다. 중대장 이 중위는 물론 유개호내 1개 분대의 병력이 전멸해 버렸다. 포격이 시작되고 단 1분도 안되어서였다. 북한군 포병은 이 유개호를 미리 조준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122mm 포는 소련이 김일성에게 건네준 큰 선물중의 하나로서 1949년 서부 전선에서 북한군과 국군이 접전할 때 최초로 등장하여 국군 간부들을 불안하게 만든 전력이 있다. 당시 122mm 탄 파편을 미 고문관에게 보였지만 역시 미적지근한 대답만 들었을 따름이었다.

 

소련제 122mm 포

 

중대장이 전사하자 부중대장인 김정규 중위가 중대 지휘를 맡아서 부대를 적 공격예상로에 배치하고 종대로 파상 공격을 해오는 북한군을 막아내었다이내흥 중대의 장교는 이내흥 중위와 3명의 소대장등 네 명이 있었는데 이 전투에서 이내흥 중위와 1소대장이 전사하고 2소대장이 중상을 입어 오직 한 명 남은 3소대장 겸 중대 부관인 김정규 중위가 중대를 지휘하여야 했다.

 

중대 본부를 해치운 북한군은  지역장악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286고지로 쇄도하였다. 이곳을 방어한 2소대는 중대장을 잃고 큰 피해를 입었지만  잘 싸웠다 개전 시작 3시간 뒤인 830분쯤 탄약이 바닥나고 적의 포격에 입은 피해가 워낙 커 할 수 없이 산을 타고 철수했다

 

160명이 넘는 중대병력 중 자기 발로 걸어서 철수할 수 있었던 병력은 40명 뿐이었다. 최종적으로 확인한 부대의 피해는 무려 60%나 되었다. 지금 춘천 전투사에서 25일 사농동의 포격전이나 26일 옥산포의 보병 돌격전, 그리고 27소양강의 도강 북한군 섬멸전을 춘천 전투의 주요 전투로 인식하고 있으나 개전 초기 병력의 전멸을 무릅쓰고 적을 막아내 황금같은 시간을 벌어준 9중대의 활약도 인정해 줄 전사 해석의 시각도 필요하다.

 

죽음을 무릅 쓴 9중대의 활약으로 후방의 포병들이 포병 전투를 준비할 시간을 벌어주었고 또 포병의 활약은 1대대에게 164고지의 참호에 전개할 시간적 여유를 갖게하여 주었다개전 1분 만에 적 포탄에 전사한 이내흥 중위를 625전쟁 최초 전사 중대장으로 분류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와 그의 부하들이 625전쟁 최초 전사자들로 인정해도 별로 무리는 없을 듯하다.

 

이 내흥 중위의 9중대는 춘천을 방어하던 6사단 (장:김종오), 7연대(: 임부택) 소속 3대대의 중대로서 연대의 왼쪽인 가평 방면에 방어를 담당한 부대였다. 3대대장 인성관 소령은 침공 당시 서울로 교육 출장 중이었다. 전투가 발발하고 돌아오긴했지만 그는 상황이 여의치 않게 돌아가자 서울 육군 본부에 가서 상황을 알아본다는 이유로 서울로 되돌아가서 여관에서 자다가 북한군 기습에 부상을 당했다. 전선이탈의 비겁행위였다. 그는 해임되었고 후임에는 연대 작전주임 이 남호 소령이 임명되었다.

 

3대대에서 비겁자가 다시 탄생했다. 가평 방면의 중대장이었던 하모 대위는 26일 밤 쌀 60가마니와 가족을 태우고 부산으로 내뺐다. 그는 부하들이 죽건말건 관심도 없었다극형에 처해야 할 적전 비겁행위였지만 그는 전쟁의 혼란기에 다른 부대로 전출을 가서 공병 여단장까지 진급하였다. 장성 진급까지 신청했다가 비겁행위가 뒤늦게 들통나 전역당했다.

 

같은 대대에서 출현했었던 이런 비겁자들과 비교해보면 적 침공의 걱정에 고지에서 밤을 지내다가 최후를 맞은 이내흥 중위의 책임의식은 국군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미군 155mm 포

 

북한의 기습에도 불구하고  육본 간부들이 밤늦게까지 열린 전날 파티로 술에 취해 잠들어 있었고 그가 소속된 사단에서도 근무지를 이탈해서 도망친 장교들까지 있었는데 그에 반해 이내흥 중위는 미리 적침을 예상하고 최전방에서 정위치를 지키다가 전사했던 책임감이 투철한 장교였다. 이내흥 중위의 동기분들의 회상에 의하면 이 중위는 키는 작달만했지만 충청도 양반답게 무척 선량했고 책임감 덩어리같이 성실한 인재였다고 한다. 국군의 역사가 언젠가는 그를 기억해주는 기회가 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본 글은 "국방부 N.A.R.A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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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ktx111 닥터K 2013.07.09 23: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춘천전투를 다룬다면 내평지서 경찰관들의 전투도 다루어 주셨으면 합니다.
    10년 전인가 월간조선에 짤막하게 다룬 적이 있는데, 내평지서 전투에서 경찰관들이 시간을 끌어주어 6사단이 춘천시내 방어전을 준비할 여유를 가졌다는 이야기더군요.

  2. 123 2013.08.01 00: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개분대 병력이 동시에 전사했는데 장교만 거론하다니 씁쓸하네요

  3. hurricane96 2013.08.07 15: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자세히는 아니지만 대략은 알고 있습니다. 지평지서 경찰관 12명의 분전으로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