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호(Trench)는 제1차 대전 당시 서부전선을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전선을 따라 연이어 깊게 파서 만들어진 참호선은 공격보다는 방어를 위한 구조물인데, 참호가 구축되었다는 사실은 전선이 쉽게 돌파하기 힘들만큼 단단히 고착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당시 수백만의 병사들이 이렇게 참호와 참호사이에서 격전을 벌이다 죽어갔다.

 

참호를 사이에 두고 많은 병사들이 죽어갔다.

 

이러한 주검의 대부분은 엄청난 포격이나 독가스에 의한 것이었지만, 돌격 명령을 받고 참호를 뛰쳐나간 병사들이 상대편 참호에서 날아오는 총탄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경우도 상당하다. 오늘날 같으면 기갑장비를 이용하여 참호선을 돌파하는 작전을 펼치겠지만 당시만 해도 포격 후 보병이 돌격 앞으로 하는 방식 외에 마땅히 구사할 전술이 없었다.

 

상대 참호로 돌격하다 많은 병사들이 죽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폭탄의 비를 퍼부어도 참호에 웅크리고 있던 상대편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였고 이렇게 살아남은 적들이 쏘아대는 총탄에 많은 돌격부대가 적진에 도달도 못하고 죽어 갔다. 이때 수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앗아간 무기가 맥심(Maxim) 기관총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독일군을 비롯한 동맹국은 물론이거니와 영국, 프랑스, 러시아 같은 연합군도 대량으로 사용하던 무기였다.

 

구한말 맥심기관총을 사용하는 희귀 사진

 

낭만적인 명칭과 달리 미국 태생으로 이후 영국으로 귀화한 제작자 맥심(Hiram Maxim)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맥심기관총은 제1차 대전 최고의 살상무기였다. 현대적 기관총의 효시로도 보는 맥심기관총은 1883년 발명되었는데, 이전의 개틀링건 방식과 달리 탄띠급탄식을 채택하여 분당 500발의 발사속도를 가졌다. 이 같은 화력의 기관총은 당시 숙련된 50명의 사수가 발사하는 소총에 해당되었다.

 

제작자 하이람 맥심과 맥심기관총

 

그런데 이 혁신적인 보병화기를 최초로 제안 받은 영국군은 1889년 도입을 하였지만 대량채용을 거부하였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기관총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량물인 맥심기관총을 제대로 운용하려면 적어도 5~6명의 인원이 필요했고 수랭식 시스템을 채용하였지만 종종 과열로 문제가 발생하고는 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보병들이 사용하기에는 곤란한 무기로 판단한 것이었다.

 

야전에서 옮겨 다니며 사용하기 힘든 중장비였다.

 

하지만 같은 시기에 이 장비의 효용성을 깨달은 독일군은 이를 라이센스 받아서 대량으로 생산하여 실전에 배치하여 그 결과 1914년 전쟁 개시 당시에 총 10만정의 맥심기관총을 장비하였다. 또 하나의 군사대국인 러시아군도 같은 방식으로 라이센스 생산하여 상당량의 맥심기관총을 보유하였다. 그에 반하여 정작 영국군은 보병대대당 2정의 기관총만 배치하였을 뿐이었다.

 

독일 중기관총 대대의 훈련모습

 

진격하기에 바빴던 전쟁 개시 직후에는 맥심기관총의 능력을 제대로 몰랐지만 참호를 파고 전선이 고착화되자 맥심기관총의 위력이 여지없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무겁기 때문에 공격 시에는 기동성 있게 옮겨 다니기에 곤란하였지만 진지를 구축하고 방어에 나섰을 때는 적을 향해서 무자비하게 총알을 퍼부어대는데 적격이었던 것이었다. 당연히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참호를 뛰어나가는 도중 기관총에 의해 전사하는 영국군의 극적인 모습을 담은 사진

 

맥심기관총의 위력을 평가절하 하였던 영국은 그들의 선공으로 시작된 솜므전투(Battle of Somme)에서 기관총으로 무장된 방어선을 단순 돌격으로 돌파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연합국도 이를 대대적으로 사용하자 맥심기관총은 제1차 대전의 학살을 뜻하는 대명사로 바뀌어 갔다. 바로 제1차 대전 당시에 살인을 뜻하는 무서운 상징물이 되었다.

 

 

본 글은 "국방부 N.A.R.A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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