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녀는 20세기를 살아갔던 대한민국의 불행했었던 여성들중에서도 특히 불행한 여성이었다단지 공비 출신이라는 이유로 돌을 던지고 외면하는 정서는 현재의 인도적인 시각으로 보면 사실 받아들일만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많은 글들은 그녀를 동정하는 분위기를 넘어서 그녀를 유관순과 같은 의혈녀나 또는 학정에 항거하다가 희생된 가여운 여성으로 보는 시각은 사실은 우려스러운 바가 있다.

 

일부 진보적 단체들이 그녀를 차별받은 인생을 산 불쌍한 인간으로 과장되게 포장해 홍보하다시피하고 반면에 이러한 포장된 이야기로 말미암아 대한민국 군경의 공비 토벌은 정순덕과 대조되어 '비인간성'이 부각되었다. 이는 대한민국 건군의 주역들인 김백일 장군이나 백선엽 장군 등이 양민을 학살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말도 안되는 매도를 당해야 하는 현실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하겠다. 정순덕은 그 시절을 살아 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이 호기심에서 만들어진 일종의 허상인 면도 있다.

 

 

그러나 귀순 공비들에게 관대한 정책을 펼쳤던 당시의 정부가 체포 된 그녀에게 사형을 구형했었던 사실을 상기해보기로 한다 그 사실은 그녀의 어떤 범죄가 그런 극형을 구형하게 했는가하는 어두워진 이면사를 밝히지 않을 수가 없다정순덕은 입산한 후에 처음에는 간호요원과 취사담당으로 일을 하다가 군경의 토벌이 거세져 공비들의 숫자가 대폭 줄어들자 총을 들고 전투에 나섰다.

 

나중에 삼인조만 남았는데 서두에서 말한대로 조장격인 이응조와 정순덕, 그리고 이홍희(李洪熙). 경찰 문서와 각종 서적은 이홍희를 이홍이(李洪伊)로 쓰고 있지만 작가 정충제 씨가 그의 고향을 찾아가 그의 본명이 이홍희가 맞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1950년대에 몰려 다니며 갖은 못된 짓을 하던 3인조는 1960년대로 들어서자 조장인 이응조가 먼저 사살되었고 이홍희와 정순덕 두 사람이 2인조가 되어서 피신해 다녔다. 이응조가 사살 된   그 시신을 정순덕과 이홍희가 매장 해버려서 이 사실을 알지 못한 경찰은 정순덕이 체포 될 때까지 3인조가 남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정순덕과 이홍희의 자수 의지를 꺾어 놓는데 큰 역할을 한 자는 조장이자 골수 공산주의자인 이응조로 생각된다. (인터넷을 보니 그의 이름이 이운조(李雲祖) 또는 이은조(銀操)라고도 하며, 여성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정순덕은 이러한 이응조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함경북도 웅기 출신이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청진 부두 노동자로 지내다가 해방 후에 열혈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덕분에 모스크바 유학까지 다녀왔고 6.25전 발발후 노동당 조직 강화를 위해서 남으로 파견되었다이응조는 남쪽 의령군 인민 위원회 부위원장을 거쳐 하동군 위원장을 지내다가 북으로 후퇴하지 못한채 지리산으로 들어온 자였다.

 

정순덕 체포후 그 녀의 자백에 따라 해발 700미터 지점의 산죽밭에 광목으로 만든 천막에서 발견한 2인조의 살림 살이. 권총은 1954년 정순덕이 국군 중대장을 사살하고 빼앗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본래 이영회 부대 소속이었는데 다 죽거나 투항해 나가고 세 명만 남아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 195412월부터였다. 이응조는 공산주의 이론까지 통달한 골수분자로서 두 사람을 끌고 다니면서 공산주의 교육을 쉬지 않았고, 정신 무장의 세뇌 교육을 놓지 않았다.

 

남편 성석조에게 최후를 안긴 남한 정부에 대한 분노와 이응조의 세뇌 교육은 무지했었던 정순덕을 절대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투쟁하는 열혈 공산 분자로 만들어 버렸다. 경찰은 50년대 중반에 들어서자 산에 남아있는 망실공비들의 신원을 완전히 파악하고 그들의 가족들을 심하게 압박해갔다.

 

공비 가족들이 당하는 고통은 극심했었다. 주변 동네 사람들의 멸시도 무척 심했다그런데도 정 순덕은 하산/자수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3인조 중에 이응조는 6112월 경찰에게 사살되고 정순덕과 이홍희 두 사람만 남아 산속을 헤매며 당국의 포위망을 피했다.

 

경찰은 정순덕이 체포 될 때까지 이응조가 죽은 사실을 몰랐었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나이는 48세였고 북에 부인과 두 명의 자녀가 있었다정순덕이 인정한 최초의 공인 가족 몰살 살인 사건은 이응조가 살아있던 19577월 이었다3인조의 유랑 공비는 세포조직과 같은 협조자 확보 활동을 펼쳤는데 이는 사용할 일용품의 확보와 함께 경찰 정보를 얻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이 제일 컸었다.

 

1963년 체포 당시 정순덕의 소지품

 

하지만 여기에 더해서 살기 위해 쫓겨다니면서도 이응조는 골수 공산당원답게 정치적으로 지방 세포 조직 확산의 꿈을 놓지 않았다. 이들은 1957년도 7월에 하동군 쌍계사 뒤쪽에 있는 화전민 독립가옥을 주목했다그 집에는 화전민 조만제(당시 40세), 이판순(38세)이라는 부부가  조복남(9세)이라는 딸을 데리고 열심히 살고 있었다.

   

19577월 한 밤에 불시로 찾아간 이응조와 이홍희는 열심히 이들 부부를 세뇌시켜 향후 협조하겠다는 억지 반승낙을 받아냈다. 하지만 3인조는 부부의 떨떠름한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삼인조는 산으로 돌아가는척 하면서 다음날 집이 잘 보이는 곳에 잠복하여 집을 감시했다.

 

아침이 되자 부부는 지게에 세간을 지고 딸까지 데리고 집에서 나왔다. 배신당한 것을 안 3인조 공비는 가느다란 군용 전화선으로 어린이가 포함된 일가족 세 명의 모두 목을 졸라 몰살시켜버렸다.

 

정순덕이 23년간 수감생활을 하며 찍은 사진

 

두 번째 집단 살인은 세월이 한참 흘러 이응조가 죽고 두 사람만 도망다닐 때 발생했다 정순덕의 고향인 산청군 삼장면 내원리 부락에 그들에게 협조하는 정위주라는 세포가 있었다여자 정순덕과 이홍희와는 빨치산 생활 이전부터 안면이 있었고 그가 대체로 협조적이어서 2인조는 일 년에 대 여섯 번씩 찾아가 식량 조달등의 도움을 받았다.

  

이 마을에는 정위주의 동생 정정수가 살고 있었다. 2인조와 정정수도 어렸을 때부터 안면이 있었다. 2인조는 그를 포섭하려고 들었다. 그러나 그는 의용 경찰 출신으로서 형과는 달랐다. 더구나 두 남녀 공비들에게 100만의 현상금이 붙어 있었다. (짜장면이 25원 할 때의 금액이니 지금의 일억원은 확실하게 넘는 액수다.)

 

사람이라면 욕심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정수는 포섭당해서 협조하는체 하면서 이들을 살폈다. 1962108일 밤 이홍희는 불시에 방문한 이들을 이전과 같이 반기며 맞았다. 그는 한참을 이야기 하다가 이홍희에게 그가 가진 칼빈총을 가리키며 말했다.

 

"난 칼빈 총은 한 번도 만져보지 못했는데, 네 총 한 번 구경 좀 하자."

 

이홍희는 아무런 의심없이 자신의 총을 내주었다. 정정수는 총을 만져 보는 척하다가 총구를 이홍희에게 겨누고 발사했다. 그러나 너무 긴장했던 탓인지 총알은 그만 이홍희의 볼을 스쳐지나가 가벼운 화상만 입혔을 뿐이었다.

 

 

 본 글은 "국방부 N.A.R.A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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