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 정신? 난 배신하겠다. -제 1 편-

 

국군 전사에서 이대용 장군은 역사에 기록되는 전설적인 전공들을 세웠었다.

육사 7기로 임관해서 1949년부터 침투하는 북
게릴라들을 상대로 전투를 경험하기 시작한 이대용 장군은 2사단 연대 대대장을 끝으로 전장을 떠나기 전까지 3년간을 총탄과 포탄이 난무하는 전투를 무려 100 여 회나 경험했었다.

전투의 달인이라는 별명도 있는 이 분은 1950년 6.26일 춘천 옥산포
전투에서 중대장으로 돌격을 선도했으며 1950년 10월 26일 압록강에 최초로 도착한 중대의 중대장이었다.


  

                                                                 이 대용 장군의 중령때 모습


그러나 그의 전설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그의 소속 부대인 7연대가 후방으로 철수하던 1950년 11월 29일부터 시작되었다.

7연대는 야간에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산산히
붕괴 되었는데 이대용 대위는 중대원을 이끌고 중공군 2만 명이 들끓는 적진을 돌파해서 6 사단에 최초로 복귀했다.

                                            이대용 장군


7연대 19명의 중대장 중 살아 돌아온 중대장이 단 7명이었는데 그 중에 군장을 갖추고 21명의 생존 중대원이나마 인솔하고 나온 중대장은 그가 유일하였다.


 

                                                             이대용 장군의 1,000리 탈출 행로.


이대용 장군은 그 후 대대장과 연대장의 보직을 거쳐
63년 월남에 파견되어 주월 무관을 지냈다. 이 장군이 월남에 특파 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 지시에 의한 것이었는데 이대용 장군은 오키나와 미군 파견 교육 때 알게 된 월남의 구엔  반 티우  대통령과 안면이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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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구엔 반 티우 대통령은 군 출신으로 정권을 잡고 대통령이 되어 월남 패망때까지 집권했다. 오키나와 미군 부대에서 훈련을 받았을 때 서로 옆자리 책상에 앉아서 교육을 받았으며 시내 외출 시에는 일본어를 잘하던 이 장군이 티우를 안내하였고 자주 술도 마셨기 때문에 그 친밀함이 매우 돈독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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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장군으로 진급한 후 주월 경제 공사라는 직책으로 다시 월남에 부임하였는데 경제 업무는 물론 긴박하게 돌아가는 당시 월남의 정보를 수집해야 했던 중앙 정보부의 업무도 담당했었다. 이 공사는 월남에서 근무하던 중에 여객기를 타고 한국을 탈출하려던 위장간첩 이수근을 사이공 공항에서 체포하여 압송하는 실적을 올리기도 했었다.


그런데 6.25 전쟁 중 여러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던 이 영웅에게 아직도
시련은 다 가시지 않았었다.

1975년 파리 협상에 의해 어정쩡한 휴전을 했었던 월남은 불안한
정전상태를 이어갔고, 급기야 1975년에 전면 공세를 취한 북부 월남과 미국의 냉대 속에 남부 월남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망하였다.

남부 월남의 패망을 예측한 박 대통령은 두 척의 해군 LST수송선을 보내서
재월 교민들을 귀국시켰는데 두 수송선은 사이공이 공산 월남군에게 점령당하기 이틀 전에 사이공 항구를 떠났다. [사이공은 현재의 호치민 시이다.]

하지만 이 배에 승선하지 못한 교민들이
150명이나 있었고 마지막까지 교민의 철수를 돕다가 미처 월남을 빠져 나가지 못한 대사관의 외교관 직원들도 여섯 명이나 있었다.

남은 대사관 인원들은 미군이 제공하는 헬리콥터로 탈출하기로 하였지만
자그만한 착오로 탑승 지점에서 헬리콥터를 타지 못했고 다시 미 대사관으로 달려 갔지만 대사관 경비병은 밀려드는 월남인들을 막느라 아무도 진입을 하지 못하게 막았었다.

만약 월남의 교민들과 외교관들의 총 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주월 대사가 책임감과 판단력을 가지고 사이공 철수를 지휘했더라면 사태가 이렇게 악화되지는 않았겠지만 그는 무책임하게도 먼저 헬리콥터를 타고 미 7함대 항모로 탈출해 버렸다.[이를 알게 된 박 정희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것은 당시 시중에 소문이 다 나있었다.]

월남에 남겨진 외교관은 이대용 공사, 서병호 영사,
안희완 영사 등 6명이었는데(안 희완 영사는 월남 전문가로 중앙 정보부 요원이었고 서 병호 영사는 경찰 총경이었다.) 탈출에 실패한 외교관들과 교민들은 환된풍 가 53번지에 집결하여 합숙하며 한국으로 돌아 갈 날들을 기다렸고, 일부 자가 소유의 집이 있거나 월남에 현지 처가 있던 십여 명의 한국인들은 사이공 시내 여기저기에 흩어져서 독립적으로 생활을 했다.

사이공이 공산군에게 접수되자 북 월남의 비밀 경찰과 
하노이 주재 북한 대사관의 정보 요원들이 재빠르게 사이공으로 달려왔다. 

도착과 동시에 월남의 KGB 격인 안닝 노이찡[安寧 內政] 요원들이
잔류 한국인들을 찾아내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월남 비밀 경찰들은 교민들이 광대뼈라는 별명으로 부르던 린 대위와 키다리라는 별명의 홍 대위, 그리고 외교부에서 지원 나온 듯한 즈엉 등이었는데, 교민들이 튀기(그는 프랑스와 월남인의 혼혈아로 보였다.)라고 별명을 붙여준 즈엉 징 특[楊 政識]은 북한 김일성 대학과 김책 대학을 나왔고 김 일성을 만나서 악수를 한 일도 있었다.

  

                         월남 대통령 궁으로 진입하는 북월남 T-55 탱크들


그들은 상호 협조하며 아주 치밀하고 교활한 전략 하에
한국인에 대한 정보 수집부터 시작했다.

그들의 최초 마수는 독립적으로 생활하는 한국인들부터 겨냥했다.
불안에 떨던 대부분의 교민들은 대충 말해주고 몸을 사리곤 했었는데, 이때 공산 월남의 초기 공작 때부터 이들에게 적극성을 가지고 접근한 한국인 배신자가 출현했다.

그는 월남 비밀경찰에게 잔류한 대사관 직원 중 경찰이나 중앙 정보부 소속의 직원들을
족집게처럼 찍어 준 것은 물론 교민들 중에서도 미군 관계 사업을 했거나 반공적인 인물들의 신상을 밀고하였다.

북, 월 두 집단의 요원들은 이 기초 정보를 바탕으로 추가 정보를
더 축적해 가다가, 마침내 1975년 6월 18일 환된풍 가 53번지의 합숙소를 급습해서 대대적인 수색과 압수를 하고 서병근, 안희완 등의 외교관과 두어 명의 민간인들을 연행해갔다.

북한과 월남의 요원들은 합숙소 급습 때부터 한국인 장군을 찾았었지만 다행히 최초 습격 때 이대용 장군은 숙소에 있지 않아 체포되지 않았었다.

체포된 사람들은 물론 합숙하고 있던 교민들에게도
퍼부어 지는 듯한 끊임 없는 심문이 이어졌는데 월남 비밀 경찰은 이중 만만해 보이거나 가치가 있는 교민들은 북한 요원들에게 넘겼고, 북한 요원들은 이들 교민들에게 북한으로 가자고 회유하거나, 회유가 안 되면 남한에 돌아가서 북한에 적극 협조하는 간첩 활동을 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동의서를 받았다.




이대용 장군과 서병호, 안희완 등 대사관 직원과 교민 중 요주의 인물들의 신원을 최초로 제보한 배신자가 얼굴을 보인 것은1975년 7월 20일이었다.

그의 배신행위로 대사관의 특수 임무 근무자 3명은
체포되어 악명 높은 치화 형무소에서 4년 반을 복역해야 했고 이대용 장군 역시 월남의 악명 높은 치화 형무소에서 4년 반을 복역해야 했는데 귀국 후 사이공 억류기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그 배신자의 이름을 배완용이라고 썼었다.

책을 재미있게 읽었던 나는 배완용의 정체에 대해서
궁금증을 안 가질 수가 없었다.

이대용 장군은 그의 전기에서 공산 월남 측과 협조하여
한국인을 포섭하려던 그의 행적을 이렇게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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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0일 월남전에 참전하고 제대한 부사관인 천 모[千 某]가 나를 찾아왔다.

그의 말은 이랬다.

7월 19일 환풍가 50번지 한국인 합숙소에서 살고 있던 천 모의 의동생이 사이공 시내에 집을 얻어 살고 있던
배완용이라는 예비역 통역 장교를 찾아갔는데 배완용이 그 집을 방문한 30대 월남 남자를 소개했다.

그 남자는 유창한 한국말로 자기가 프랑스인과 월남인의
혼혈아이며 현재 사이공에 있는 프랑스 영사관에 근무하고 있다고 이야기 한 후 배 완용의 의동생에게 교민들이 원하기만 하면 평양에 갈 수 있는 것을 아느냐고 하면서 북한에 대한 찬양 선전을 하더라는 것이다.

청천벽력의 소리를 들은 천 모의 의동생은 그 30 대 월남인 남자의
언동으로 보아 그 자는 북한측과 협조 하고 있는 공작원이 틀림없으며, 따라서 그와 만남을 주선해준 배완용 역시 이미 북한에 포섭되어 있는 것이 확실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생각할수록 소름이 돋아 밤새도록 고민한 천 모의 의동생은 의형인 천 모를 찾아와
상의를 하였는데, 천 모의 의동생은 이 사실을 나에게 보고하고 지시를 받자고 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나는 천 모의 의동생에게
"첫째, 이 사실을 극비에 부치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며 배완용의 집에도 가지 말 것,
둘째, 불가피하게 배완용의 집에 가서 그들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지체없이 의형을 통해 나에게 보고하고 지시를 받을 것,
셋째, 자유 조국 대한민국을 배반하지 말 것.." 등등의 지시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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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공 시내에 진주하는 북 월남군의 T-55탱크들


합숙소를 급습해서 수색한 월남 공산측은 합숙하던 모든 한국인들을 공안 당국에 불러들여 심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시내 외진 곳에 살며
그 이전에는 거의 합숙소에 찾아 온 일이 없던 배완용이 갑자기 하루에 오전과 오후 두 번씩 환된풍 가 53번지에 나타나 동정을 살펴보고 돌아가는 것이었다.

한국인들이 집단 합숙하는 횐된풍 가 53번지에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인 해군 56함 전몰 유가족 한 사람 이 살고는 있었지만 배완용은 특별히 그를 만날 용건이 없었고 사실 만나지도 않았었다.

이에 배완용에 대한 의혹을 더욱 굳힌 이대용 장군은 교민 회장 이순흥씨를 시켜
그가 마제스틱 호텔에 출입 하는지를 감시하라는 지시를 했다.

마제스틱 호텔은 북한 공작원 3 명이 503호와 504호에 자리를
잡고 상주하는 곳으로 배완용이 이 곳에 나타난다는 것은 그가 북한 공작원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었다.

이 회장의 심복 2 명이 9월 28일 오전 마제스틱
호텔 정문 앞에서 배 완용과 마주쳤는데 배완용은 당황하면서 마제스틱 호텔 바로 옆 건물인 맥심으로 급히 들어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맥심은 유명한 나이트 클럽이 있던 곳으로서 월남전 중에는
미군들이 출입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월남 패망 후에는 폐업하였고 황폐해진 그 곳에는 출입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당황한 배완용이 그 곳으로 가는 척 했을 뿐이었다.

배완용으로부터 잔류한 한국 교민의 동향을 밀고 받은 북한 공작원들은
이 정보를 월남 비밀 경찰인 안닝 노이찡에 넘겼다.

                                       미 대사관에서 마지막 헬리콥터에 탑승하는 월남 탈출자들


안닝 노이찡의 세 명의 담당들, 광대뼈 키다리 튀기 등의 세 명은 북한 공작원들에게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한국인 교민들을 들볶았다.

말이 들볶은 것이지 당사자들에게는 목숨이 끊길지도 모른다는
공포 분위기가 매일 같이 계속 되었는데 말을 듣지 않으면 즉결 재판과 즉결 처형을 하겠다는 위협은 교민들이 버티기 힘든 정신적 고문이었다.

교민들 중 반공 색채가 강하거나 베트콩 등과 전투를했던 교민들은 치화 정치 형무소로 끌려 가서 고문을 당했는데 이대용 장군과 안희완 영사, 서병호 영사 등을 포함해서 형무소에 구금된 한국인들이 11명이나 되었다.

무고한 교민들 중에 몇 명은 1년 가까운 형무소 살이를 하기도 했다. 단, 예외적으로 사기 등의 죄목으로 구속된 최 모라는 교민만 6년 가까이 복역했다.

 
  

                             월남 붕괴시 긴급 헬리콥터 탈출은 미 해병들의 철저한 통제하에 실시 되었다. 


앞서 말했지만 배완용이 저지른 최대의 민족 배신 부역 행위는 대사관
직원 중 특수임무 종사자 세 명의 세밀한 신상을 통보해준 것이었다.

이대용 장군이 경제 공사의 임무를 보고 있으면서 내밀하게
정보 업무를 보고 있는 중앙 정보부 소속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는데, 이미 북한 공작원까지 사이공에 들어와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정보를 넘기는 것은 이대용 장군을 강제 북송되게 할지도 모를 잔인한 행위였다.



  

                                                            미 대사관저로 진입하기 위한 투쟁 


그가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교민들을 집중 취조했던
공산 월남 요원들은 먼저 안희완, 서병호씨를 체포하였고 뒤이어 면밀한 수사 끝에 1975년 10월 3일 이대용 장군을 체포하였는데 이대용 장군도 안희완, 서병호씨 등이 이미 수감되어 있던 치화 형무소로 끌려가서 구금되었다.

치화 형무소에 들어갔었던 한국인들이 몇 명 있었지만
그들은 얼마 후에 모두 석방되어 한국으로 돌아갔고 이대용 장군 등 한국 외교관들은 베트남에 반대 행위를 했다는 죄목으로 재판도 없이 갇혀있었는데 외교관을 이렇게 구금한다는 것은 정상적인 국제 관계에서 있을 수가 없는 만행이었다.

형을 선고 한 뒤에도 안닝 노이찡의 광대뼈 일당은
쉬지 않고 이대용 장군을 압박하며 북한 망명 신청서나 협조 동의서에 싸인하도록 압력을 가했지만 이대용 장군은 그런 막무가내 협박에 끝까지 저항하여 안닝 노이찡 정보요원들이 고개를 흔들며 포기하게 만들었다.

[이 장군은 알카에다 조직책 자르카위에게 공개 살해당한 김선일씨의 경우를 보면서 자신도 그런 종말을 맞으리라는 각오를 했었던 30년 전의 시련이 떠오르더라는 것이었다.]


이대용 장군이 완강한 것을 알게 된 북한 대사관의 요원들은 이 장군을 면담하는 것조차 포기하고 평양에 이를 보고했다.

그러자 북한은 최고 전문가 세 명으로 구성된 설득 팀을 월남으로 급파했다. 파견한 조직은 노동당 통일 전선부 [3호 청사]다. 이들에게는 이대용 장군을 강제로 세뇌시켜 북으로 데려올 임무가 주어졌다.

지시를 직접 내린 사람이 김정일이었다고 하는데 김정일은 월남 억류 한국인들에게 까지도 끈질긴 고통을 주던 인간이었다.


  

                                                          미 항모에 긴급 피신한 운좋은 월남인들


북에서 온 설득팀 세 명 중 한 명은 김영삼 정부때인 1994년 열린 남북 회담에서 남한 측 송영대 대표에게 표독스러운 눈알을 굴리며“서울이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전쟁이 나면 불바다가 되고 맙니다.”하고 소위 '서울 불바다' 협박을 했었던 박영수였다.

이 장군은  월남 치화 형무소를 찾아온 3인조 중에서도 박영수는 아주 은근하고 교활한 술수를 구사했다고 회고했다.



  

                                                              박 영수 -  2004년 간암으로 사망했다.


이들 세 명은 치화 형무소에 찾아와서 이대용 장군을 구스르고 협박하며 북한행을 강권했지만 허사로 돌아갔다. 포화가 난비하는 전장의 사선을 수 십 번 넘나들었던 전투의 달인에게 그런 협박은 사실 효과를 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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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여담이지만 밝히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전자 백과사전 위키페디아에 이대용 장군이 주월 한국군
부사령관이었고 베트콩들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송환 되었다는 엉터리 글이 있어서 내 블로그에 이를 지적하는 글을 포스팅 했더니 고맙게도 미 교포로 보이는 독자가 이를 삭제했었다.

이대용 장군은 초산 탈출 때도 중간에 포로가 되는
경우에는 자살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부하들에게 다짐했었다.

체포 당시 이 분의 신분은 외교관이었고 북 월남이 국제법을
어기고 불법적으로 억류한 것인데 위키페디아가 실수를 한 것이다. 

이 장군은 북한 공작원들의 강제 북송 위협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만약 강제 북송이 실제 발생하면 자결하겠다는 각오를 단단히 했었고 박 대통령에게 보내는 비밀 서신에서도 북송 될 때는 죽음으로서 국가와 군의 명예를 지키겠다는 맹세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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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마구잡이 공산 월남이었지만 북한이 원한다고 남한 외교관을
북으로 강제 북송할 수는 없었다.

이 대용 장군이 협박에 굴하지 않고
강하게 거부하자 이들 북한의 정예 요원들도 빈손으로 돌아갔다.

이들 노동당 조직에서 일하던 한 요원이 나중에 귀순하여 이후의 내막을 다 이야기 해주었는데, 이대용 장군의 강제 북송을 시도했었던 노동당 비밀 공작 팀에서는 이들 강제 압송팀이 이 장군을 설득해서 데려 올 것을 믿어마지 않아 대대적이고 치밀한 환대 준비를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월남에 갔었던 패거리는 기대 밖으로 빈
 손으로 터덜터덜 돌아왔고 모르긴 몰라도 월남 파견 3인조는 이를 지휘했었던 성질 사나운 김정일에게 크게 욕을 얻어 먹었을 것이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